1화(5,213자) · 기훈 · 구월 초사흘

두 번 산 초사흘

같은 날을 두 번 산다, 대가는 몸이 · 백해원

갑인년 구월 초사흘을 나는 두 번 살았다. 첫 번째 초사흘에 나는 동무를 쳤고, 두 번째 초사흘 새벽에 그 동무는 조곡관 벼랑 아래 물가에 엎어져 있었다. 두 번째 날에는 아무도 내가 그를 친 줄 모른다. 첫 번째 날은 세상에서 지워졌다.

그 지운 날부터 말하겠다.

그날 나는 마지막 짐을 지고 새재를 넘었다. 조령관 문루 밑을 지날 때 해가 등 뒤에서 비스듬히 들어와 돌로 쌓은 홍예 안쪽이 누렇게 달아올라 있었고, 지게 위 무명 스무 필이 한쪽으로 쏠려 끈이 어깨를 파고들었다. 짐이 쏠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쏠린다. 나는 왼쪽으로 백열두 푼 기운 사람이다.

하루를 빌리면 한 푼 기운다. 고갯마루 선돌 셋 가운데 서서 해 질 녘에 「하루만」 하면, 자고 일어났을 때 같은 날 새벽이 한 번 더 온다. 남들은 그 두 번째 날 하나만 산다. 첫 번째 날을 아는 것은 빌린 사람뿐이고, 그 대신 빌린 날 밤마다 몸 한쪽이 한 푼씩 무거워진다. 열 날이면 남 눈에 보이고 백 날이면 혼자 못 선다고들 한다. 나는 백열둘인데 아직 선다. 지게 작대기가 있어서다.

갚는 법은 걷는 것이고 하루치에 사십 리라고 배웠다. 여섯 해 전에 나를 가르친 사람이 그렇게 말했고, 나는 그 말을 믿고 그 사람 짐을 여섯 해 졌다. 문경에서 충주로, 충주에서 문경으로 오갔다. 백열두 날치면 사천사백팔십 리다. 그날 조령관을 넘으면서 나는 그 수를 다 채웠다.

그런데 몸은 그대로였다. 주흘관 앞 돌다리를 건널 때도 왼발이 먼저 미끄러졌고, 물에 비친 내 그림자는 여섯 해 전처럼 비딱하게 누워 있었다.

*

돌셋 주막은 첫째 관문 주흘관 아래, 옛 조령원 터 돌담 곁에 붙어 있다. 초가 네 칸에 마방이 딸렸고, 마당 한가운데 큰 가마솥에서는 늘 쇠죽 끓는 냄새가 올라온다. 주인 마치석은 마루 끝에 앉아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쉰셋인데 허리가 활처럼 곧다. 기운 사람만 드나드는 주막의 주인이 제일 곧게 앉아 있다. 나는 그것이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이상하지 않았다.

“기훈이 왔나. 무명 스무 필, 맞게 왔지?”

“맞게 왔소. 그리고 이걸로 사천사백팔십 리요.”

나는 지게를 내려놓고 마루 앞에 섰다. 선다고 해도 작대기에 기대 반쯤 누운 꼴이었다. 마치석이 곰방대를 떼고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래서?”

“한 푼도 안 줄었소. 객주 어른이 걸으면 갚는다 하셨소.”

“덜 걸은 게지.”

“세었소. 짐 하나에 몇 리, 날마다 세었소.”

“셈이 틀렸나 보지. 아니면 자네가 그동안 또 빌렸거나.”

마당에 있던 짐꾼 둘이 웃었다.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한 사람은 앞으로 기운 사람이라 둘이 나란히 웃으니 인(人) 자 모양이 됐다. 나는 웃지 않았다. 마치석이 엽전 꾸러미를 마루에 던졌다. 무명 스무 필 짐삯으로 석 냥이었다. 여섯 해 동안 나는 그 꾸러미를 받을 때마다 고개를 숙였다.

“더 걸어. 걷다 보면 줄어. 자네들이 걸어 준 덕에 새재 짐이 돌고, 짐이 도니까 자네들도 밥을 먹어. 서로 좋은 일 아닌가?”

그 말을 등 뒤로 듣고 나는 건넛집 쌍봉댁 주막으로 건너갔다. 돌셋 주막 밥은 짐꾼한테 외상으로만 준다. 외상이 쌓이면 또 짐을 져야 한다. 그래서 나는 밥만은 늘 쌍봉댁에서 제 돈 내고 먹었다.

부엌 앞 평상에서 경구 누이 경례가 국밥을 퍼 주었다. 열여섯인데 국자 쥐는 손목이 쌍봉댁보다 굵다. 경례는 내가 기울어 앉는 쪽에 늘 사발을 반 뼘 당겨 놓는다. 안 그러면 내 숟가락이 상 밖으로 나간다.

“아저씨, 오늘 다 채운 날이라면서요. 사천 몇 리.”

“사천사백팔십.”

“그런데 왜 아직 그렇게 누워 계세요?”

“앉아 있는 거다.”

“그게 앉은 거면 우리 집 굴뚝도 앉아 있게요.”

쌍봉댁이 부엌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주모는 웃을 때 가슴이 두 번 들썩여서 쌍봉댁이다. 나는 국밥 위 파를 건져 먹으며 대꾸를 안 했다. 경례가 행주로 평상을 훔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 오라비는 요새 좀 곧아졌어요. 아저씨 눈에도 보여요?”

“모르겠다.”

“보이면서.”

나는 사발을 비우고 엽전 셋을 평상에 놓고 나왔다. 그러고는 돌셋 주막 뒤 우물가로 갔다. 두레박 줄을 당기는데 누가 내 어깨를 쳤다. 도경구였다.

*

경구는 나와 여섯 해를 같이 걸은 등짐꾼이다. 서른둘이고, 오른쪽으로 쉰 몇 푼 기울어서 우리 둘이 나란히 걸으면 멀리서 보기에 팔(八) 자 같다고 쌍봉댁이 놀렸다. 그날 경구는 이상하게 곧았다. 눈에 띌 만큼은 아니고, 여섯 해 옆에서 걸은 사람만 알 만큼.

“기훈아, 나 두 푼 줄었다.”

“걸어서?”

“말해서.”

경구가 두레박을 뺏어 들고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턱으로 물이 흘러 무명 저고리 앞섶이 검게 젖었다.

“걸음터에 단이라는 여자가 있어. 그 여자 앞에서 내가 빌린 날 얘기를 했다. 지운 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다시 살았는지. 다 듣더니 욕을 하더라. 욕을 먹고 자고 일어났는데 두 푼이 없어.”

“욕을 먹어서 줄었나 보지.”

“웃기지 마. 걸어서는 안 갚아져. 여섯 해 걸었는데 너도 그대로잖아. 객주가 거짓말한 거야. 우리를 짐꾼으로 쓰려고.”

나는 그 말이 맞는 줄 알았다. 알아서 싫었다. 사천사백팔십 리가 그 자리에서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그걸 경구 입에서 들은 것이 더 싫었다. 경구는 신이 나서 계속 떠들었다. 걸음터 사람들을 데리고 새재를 넘겠다, 객주한테 따질 게 있다, 오늘 해 지기 전에 조곡관에서 보자더라.

“너도 가서 말해. 백열둘이면 한 달이면 반은 준다.”

“뭘 말해. 무슨 말을.”

“빌린 날 얘기를 하라니까. 그 백 날, 왜 빌렸는지.”

그 백 날의 까닭을 나는 모른다. 그걸 경구는 알았다. 알면서 두 푼 가벼운 얼굴로 웃었다. 나는 두레박 줄을 놓고 경구의 왼뺨을 쳤다. 주먹이 뼈에 닿는 소리가 우물 안으로 떨어져 한 번 울렸다.

경구는 뺨을 쥐고 나를 오래 봤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조곡관 쪽으로 올라갔다. 오른쪽으로 기운 등이 돌담 모퉁이를 돌 때까지 나는 우물가에 서 있었다. 주먹 마디가 저녁 내내 욱신거렸다.

*

해 질 녘에 나는 고갯마루로 올라갔다. 그날을 지우고 싶었다.

돌 셋은 조령관 바로 아래 억새 비탈에 있다. 사람 키 반만 한 선돌 셋이 세모로 서 있고, 가운데 흙은 누가 늘 밟아서 반들반들하다. 해가 월악 쪽으로 내려앉으면 돌 그림자 셋이 길게 늘어나 가운데서 한 번 겹치는데, 그때 가운데 서서 「하루만」 하면 된다. 억새 사이로 산바람이 치올라 오면서 마른 풀 냄새와 멀리 주막에서 솔가지 태우는 연기가 한데 섞였다.

비탈을 다 올랐을 때 돌 가운데서 사람이 하나 걸어 나왔다. 마치석이었다.

객주는 나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갓끈이 한쪽으로 풀려 있었고, 호박 구슬을 꿴 끈이 턱 밑에서 흔들렸다. 오른손등에 손톱으로 긁힌 붉은 줄이 세 가닥 나 있었다. 해가 그 손등을 비췄다.

“자네도 하루 더 살러 왔나?”

“객주 어른은 왜 오셨소?”

“나도 사람이야. 무를 게 있지.”

마치석이 웃었다. 웃는데 입꼬리만 올라갔다. 그는 풀린 갓끈을 손가락으로 감아 넣으며 나를 지나쳐 내려갔다. 갓끈 구슬이 몇 알인지 나는 세지 않았다. 그때는 셀 까닭이 없었다.

나는 돌 가운데 들어서기 전에 한참 서 있었다. 빌리면 한 푼 더 기운다. 백열셋이 되면 작대기를 하나 더 깎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경구 뺨을 친 날을 안고 자는 것보다는 나았다. 쌍봉댁 평상에서 경례가 반 뼘 당겨 놓던 사발이 생각났다. 내일 그 애가 오라비 얼굴의 멍을 보고 누가 그랬느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들어섰다. 그림자가 겹쳤다.

“하루만.”

그날 밤 주막 헛간에서 나는 왼쪽 옆구리로 한 푼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이제 백열셋이다. 무거운 짐을 한 짐 더 얹는 것과 같다. 다만 이 짐은 내려놓을 데가 없다.

*

두 번째 초사흘 새벽, 닭이 두 홰 울었을 때 나는 이미 신을 신고 있었다. 이번에는 경구를 안 칠 작정이었다. 우물가에서 두 푼 줄었다고 하면, 잘됐다고 말해 줄 작정이었다. 여섯 해 동안 한 번도 못 한 말이다.

빌린 날 새벽은 늘 조금 낯설다. 헛간 틈으로 들어오는 빛도, 마방에서 말이 콧김 부는 소리도, 부엌에서 쌍봉댁이 솥뚜껑 여는 소리도 어제 들은 그대로인데, 나만 그것을 두 번째로 듣는다. 여섯 해 동안 백열두 번 이런 새벽을 맞았다. 그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세상은 처음인데 나 혼자 헌것이다.

나는 우물가에 쪼그려 앉아 경구를 기다렸다. 두레박 줄이 이슬에 젖어 차가웠다. 할 말을 입속으로 몇 번 굴려 봤다. 잘됐다. 두 푼이면 큰 거다. 나도 가 볼까. 입에 붙지 않아서 몇 번을 더 굴렸다. 해가 관문 문루 기와 끝에 걸릴 때까지 경구는 오지 않았다.

주막 마당으로 나가니 사람들이 조곡관 쪽으로 뛰고 있었다. 쌍봉댁이 앞치마를 쥔 채 소리쳤다.

“경구가, 경구가 벼랑 밑에.”

조곡관 아래 벼랑길은 물길 위에 선반처럼 붙어 있다. 난간이 없다. 그 아래 바위틈에 경구가 엎어져 있었다. 밤새 서리가 내려 등허리가 희끗했고, 물소리가 너무 커서 사람들 웃음도 울음도 다 물에 먹혔다. 누가 밤중에 발을 헛디뎠다고 했다. 누가 술을 먹었나 보다고 했다. 경구의 오른손은 주먹을 꽉 쥔 채 굳어 있었다.

나는 그 앞에서 다리가 풀렸다. 빌린 날은 새벽부터 다시 시작한다. 산 사람은 다 새벽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경구는 돌아오지 않았다.

지운 날에 죽은 사람은 두 번째 날에 안 깬다. 그 말을 나는 여섯 해 전에 한 번 들었고, 잊고 살았다.

경구의 왼뺨에 멍이 있었다. 푸르게 부어오른 자리가, 내 주먹 크기만 했다.

그때 경례가 사람들을 헤치고 내려왔다. 앞치마에 밀가루가 묻은 채였고 짚신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경례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바위틈으로 기어 내려가 오라비 곁에 무릎을 꿇더니, 서리 앉은 등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고 쓸었다. 서리를 털어 주는 손이었다. 추울까 봐 그러는 손이었다.

“오라비, 일어나. 짐 져야지.”

누가 경례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경례는 그 손을 뿌리치고 경구의 굳은 주먹을 제 두 손으로 감쌌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못 내려갔다.

사람들 틈에서 누가 내 어깨를 짚었다. 돌아보니 마치석이었다. 갓을 반듯하게 쓰고, 갓끈 호박 구슬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지런했다. 오른손등은 깨끗했다. 새벽으로 돌아간 손이다.

객주는 경구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고는 내 귀에 대고 아주 낮게 말했다.

“이번에는 주먹 쓰지 말게. 보는 눈이 많아.”

나는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었다. 두 번째 날에 나는 경구를 친 적이 없다. 그걸 아는 사람은 첫 번째 날을 산 사람뿐이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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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해원작가2026.10.09· 1화

    작가 백해원입니다. 같은 날을 한 번 더 살 수 있지만, 첫 번째 날은 빌린 사람만 압니다. 1화의 두 번 산 초사흘을 읽고, 여러분이 다시 살고 싶은 하루가 있다면 언제인가요?

  • 조용한책상2026.05.11· 1화

    문장이 짧은데 밀도가 있어요. 계속 읽게 됩니다.

    • 백해원작가2026.05.12

      같은 출발점 작품들 저도 다 읽었습니다. 정말 다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