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345자) · 서한결 · 5월 17일(월)

회랑

K2 (3차대전 3부작 제1부) · 네오

수바우키 회랑은 65킬로미터다⁠.

북쪽이 칼리닌그라드⁠, 남쪽이 벨라루스이고⁠, 그 사이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잇는 땅이 서울에서 평택까지도 안 되는 길이로 남아 있다⁠. 그 길이 끊기면 발트 삼국은 육로로 고립된다⁠. 10년 동안 나토의 모든 도상 훈련이 그 65킬로미터에서 시작했다⁠.

2027년 5월 17일 0420⁠, 그 길에 실제로 차량이 들어왔다⁠.

서한결은 모롱의 정비고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정비고에는 K2(⁠국산 3세대 전차⁠, 폴란드 도입분⁠) 세 대가 들어와 있었는데⁠, 두 대는 주행계통 정기 점검이었고 한 대는 포수 조준경에 습기가 찬 차였다⁠.

“⁠판 서⁠. 브라니에보로 나갑니다⁠.⁠”

브란도프스키 소령이었다⁠. 여단 예하 전차대대장인 그는 폴란드 사람들이 다 그러듯 한결을 판 서라고 불렀다⁠. 판이 미스터고 서가 성인데⁠, 반년쯤 지나니 그 호칭이 이름처럼 들렸다⁠.

“⁠몇 대요⁠?⁠”

“⁠대대 전량입니다⁠. 여단 전체가 움직입니다⁠.⁠”

“⁠조준경 그거 아직 안 끝났습니다⁠.⁠”

“⁠그대로 나갑니다⁠.⁠”

정비고 안쪽에서 노트북을 옆구리에 낀 사람이 나왔다⁠. 신다율은 같은 회사 다른 팀으로⁠, 한결이 55톤짜리를 보는 동안 그 뒤를 따라다니는 무인 지상차량 여섯 대를 본다⁠. 작년에 전차와 묶어서 판 물건이었다⁠.

“⁠판 서님⁠, 저희 것도 같이 나갑니다⁠. 여섯 대 중에 네 대만 됩니다⁠.⁠”

“⁠두 대는 왜 안 됩니까⁠?⁠”

“⁠조향 액추에이터가 없습니다⁠. 전차 것하고 규격이 다릅니다⁠.⁠”

“⁠같은 회사에서 왜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다르게 만들어야 따로 팔립니다⁠.⁠”

다율은 웃지 않고 말했다⁠. 회사 이야기를 회사 사람한테 하는 얼굴이었다⁠.

한결은 렌치를 내려놓았다⁠.

“⁠소령님⁠. 저는 계약서상 전투 지역에 못 들어갑니다⁠.⁠”

“⁠압니다⁠.⁠”

브란도프스키는 그 말을 하고 나서 모자를 벗었다⁠. 정비고 안에서 모자를 벗는 장교를 한결은 처음 봤다⁠. 벗은 자리의 머리카락이 땀에 눌려 있었고⁠, 그는 모자를 두 손으로 쥔 채 챙을 한 번 접었다가 폈다⁠.

“⁠저는 판 서에게 명령을 못 내립니다⁠. 우리 소속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정비고 밖에서 엔진이 걸렸다⁠. 1⁠,500마력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소리는 다른 무엇과도 닮지 않았고⁠, 55톤짜리 48대가 그 소리를 내자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올라온 떨림이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차올랐다⁠. 한결은 그 소리를 2년 반 들었다⁠. 창원에서 조립하고 그단스크에서 하역해 모롱까지 실어 온 뒤에도 그는 여기 남았다⁠. 자동장전장치는 손이 많이 간다⁠. 셋이 타고 분당 10발을 쏘려면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어디까지 왔습니까⁠?⁠”

브란도프스키가 종이 지도를 폈다⁠. 전자지도는 사흘 전부터 믿지 않는다고 했다⁠. 손가락 두 개가 회랑의 북쪽 입구 골다프와 남쪽 입구를 동시에 짚었다⁠. 양쪽에서 들어와 가운데서 만나면 그 65킬로미터가 끊긴다⁠.

“⁠공군은 못 뜹니까⁠?⁠”

“⁠못 뜨는 게 아니라 안 뜨는 겁니다⁠. S-400(⁠러시아 장거리 지대공 체계⁠)이 칼리닌그라드에서 회랑 전체를 덮습니다⁠. 높은 하늘은 비어 있고 낮은 하늘은 꽉 차 있습니다⁠. 판 서⁠, 지금 전차 한 대를 잡는 건 대전차 미사일이 아니라 몇백 유로짜리 자폭 드론 하나입니다⁠. 위에서 떨어집니다⁠.⁠”

“⁠자동장전장치가 물리면요⁠?⁠”

“⁠그걸 여쭈려던 참입니다⁠. 우리 승무원들 교육은 다 받았는데⁠, 야전에서 장전기가 물린 걸 본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수동으로 넣으면 분당 3발이다⁠. 10발에서 3발로 떨어진 전차는 3발 쏘고 죽는다⁠. 둘 다 그 계산을 알고 있어서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한결은 공구함을 들었다⁠.

“⁠조준경은 실리카겔로는 안 되고 건조기를 물려야 합니다⁠. 건조기가 여기 하나뿐이니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계약서 말씀하셨는데요⁠.⁠”

“⁠계약서에 정비 지원이라고 돼 있고⁠, 지원 장소는 안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저 48대 중에 31대는 제 손으로 인수 점검했습니다⁠.⁠”

“⁠서울에는 뭐라고 하실 겁니까⁠?⁠”

한결은 휴대전화를 봤다⁠. 본사에서 온 마지막 문자는 어제 1400이었다⁠. 현지 상황 파악 중⁠, 추가 지침 대기⁠.

“⁠아직 파악 중이랍니다⁠.⁠”

*

브라니에보까지 90킬로미터를 6시간에 갔다⁠. 전차는 시속 70킬로미터가 나오지만 그건 시험장 숫자고⁠, 48대가 종대로 가면 앞이 설 때마다 뒤가 다 섰다⁠. 한결은 건조기를 정비지원차 뒷칸에 싣고 벨트를 두 번 감았다⁠.

“⁠판 서⁠. 담배 피웁니까⁠?⁠”

운전병이었다⁠. 스무 살이 될까 말까 한 얼굴이었다⁠.

“⁠안 피웁니다⁠.⁠”

“⁠잘하셨습니다⁠. 지금 담배 한 갑이 계란 서른 개입니다⁠. 돈은 안 받습니다⁠. 계란은 먹기라도 하니까요⁠.⁠”

“⁠그러면 계란은 뭘로 삽니까⁠?⁠”

운전병이 한참 생각했다⁠.

“⁠…담배로 삽니다⁠.⁠”

반대 차선으로는 차들이 서쪽을 향해 줄지어 갔다⁠. 지붕에 매트리스를 묶은 승용차⁠, 뒷좌석 창에 개가 코를 붙인 승합차⁠, 짐칸에 의자를 거꾸로 쌓은 트럭이 전차 종대와 스칠 때마다 속도를 줄였다⁠. 창을 내린 여자 하나가 전차를 향해 손을 흔들다가 그 뒤에 따라오는 정비지원차를 보고 손을 내렸다⁠. 흙 묻은 트럭에는 흔들 이유가 없었다⁠.

“⁠판 서는 왜 안 가십니까⁠? 한국은 여기서 멉니다⁠.⁠”

“⁠제가 가면 저 조준경을 누가 봅니까⁠?⁠”

“⁠다른 한국 사람이 옵니까⁠?⁠”

“⁠안 옵니다⁠.⁠”

운전병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계란이 생기면 하나 드리겠다고 했다⁠.

브라니에보 집결지는 옛 협동농장 자리였고 여단 지휘소는 두 번째 동 지하에 있었다⁠. 지하는 낮고 추웠다⁠. 벽에는 종이 지도가 붙어 있었고⁠, 그 옆에 나토에서 내려온 통합 화면 하나가 켜져 있었다⁠. 지도 위에 뜬 점마다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궤도차량 0⁠.91⁠, 자주포 0⁠.77⁠, 미상 0⁠.43⁠. 위성과 드론과 감청을 모아 기계가 뽑은 확률이었다⁠. 0⁠.43짜리 점은 절반도 안 되는데 지도 위에서는 다른 점들과 똑같이 생겼다⁠.

“⁠0⁠.43도 표적이 됩니까⁠?⁠”

“⁠됩니다⁠. 사람이 한 번 더 보고 정하게 돼 있는데⁠, 요즘은 볼 시간이 없습니다⁠.⁠”

대답한 참모는 그 말을 하면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결은 정비 교범 맨 앞장에 적힌 문장을 떠올렸다⁠. 계기가 이상하면 계기부터 의심하라⁠. 그 문장을 쓴 사람은 계기가 스스로 판단하는 날을 생각하지 못했다⁠.

화면 오른쪽 위에는 흰 글씨 한 줄이 따로 떠 있었다⁠.

회랑 차단 예상 60시간⁠.

“⁠저 숫자는 누가 낸 겁니까⁠?⁠”

한결이 옆의 참모에게 물었다⁠.

“⁠어느 연구소가 몇 해 전에 돌린 워게임입니다⁠. 나토가 그 숫자를 받아서 화면에 올려 뒀습니다⁠.⁠”

“⁠60시간이면 모레 저녁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저걸 안 봅니다⁠.⁠”

여단장은 오십 대였고 계급장 말고는 특별할 게 없는 얼굴이었다⁠. 가동률은 마흔여덟 중 마흔넷⁠, 그중 열둘의 열상이 습기로 흐려져 있었다⁠. 한결은 건조기로 한 대에 네 시간이라고 답했다⁠.

“⁠열둘이면 48시간이군요⁠. 이틀은 없습니다⁠.⁠”

“⁠렌즈 쪽에 찬 것은 2시간이면 되니⁠, 여섯 대는 오늘 밤 안에 됩니다⁠. 어느 게 어느 건지는 열어 봐야 압니다⁠.⁠”

“⁠그러면 열어 보십시오⁠.⁠”

참모가 지시봉을 들었다⁠. 북쪽 두 개 제파와 남쪽 한 개 제파가 어제 자정 기준 22킬로미터와 31킬로미터를 들어왔고⁠, 지시봉이 두 점 사이를 짚자 남은 거리는 12킬로미터였다⁠. 여단 손실 넷 중 셋이 상부 피탄이었다⁠. 한결은 수첩에 그것을 적었다⁠. 전차는 정면이 두껍고 위가 얇다⁠. 세상의 모든 전차가 그렇고⁠, 그래서 지금 제일 많이 오는 것이 위로 온다⁠.

“⁠동맹은⁠.⁠”

참모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협의 중이라고 합니다⁠.⁠”

여단장이 지시봉을 받아 발트해 남안을 한 번 훑었다⁠.

“⁠저쪽은 우리를 부수러 온 게 아닙니다⁠. 이 길을 끊어 놓고⁠, 끊겼는데도 아무도 안 온다는 걸 보여 주러 온 겁니다⁠. 조약은 종이라서 안 찢어집니다⁠. 한 번 안 지켜지는 걸 보여 주면 그다음부터 그 종이를 믿는 나라가 없어질 뿐입니다⁠.⁠”

지하가 조용해졌다⁠. 여단장이 지시봉을 내려놓았다⁠.

“⁠12킬로미터 남았고⁠, 우리는 마흔넷입니다⁠.⁠”

밖으로 나오니 어두웠다⁠. 마당에 선 전차들의 배기 열이 위로 흔들렸다⁠.

“⁠판 서⁠. 여섯 대만 하시면 됩니다⁠.⁠”

“⁠12대 다 하겠습니다⁠. 기관실 배기에 지그를 걸어서 그 열로 말리겠습니다⁠. 온도가 안 맞으면 습기가 도로 찹니다만⁠.⁠”

“⁠해 보셨습니까⁠?⁠”

“⁠아니요⁠.⁠”

“⁠그러면 오늘 처음 하시는 겁니까⁠?⁠”

“⁠예⁠. 대신 실패해도 지금보다 나빠지지는 않습니다⁠.⁠”

지그는 부서진 트럭 난방 덕트와 알루미늄 테이프로 만들었다⁠. 배기 그릴 한쪽을 떼어 덕트 입을 대고⁠, 덕트 끝을 옆 차 조준경 덮개 틈에 물린 뒤 틈을 젖은 천으로 막았다⁠. 너무 뜨거우면 렌즈를 붙인 접착부가 밀리고 너무 미지근하면 습기가 안 빠지므로⁠, 그는 덕트 중간에 온도계를 테이프로 감아 놓고 삼십 초마다 들여다봤다⁠. 기관실에서 올라온 열이 손등을 스쳤고 경유 타는 냄새가 옷에 배었다⁠.

브란도프스키는 돌아가지 않고 한 발 뒤에 서 있었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부탁할 게 없었다⁠.

*

2350⁠, 동쪽으로 20킬로미터⁠.

소나무 숲 안에 접이식 탁자 하나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에 모니터 둘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탁자 앞의 남자는 마흔을 조금 넘겼고⁠, 소령 견장 위에 방수포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부하들은 그를 소콜로프 소령이라고 불렀다⁠. 그는 모니터 불빛이 새지 않게 천막 자락을 손으로 한 번 더 여미고⁠, 높이 뜬 정찰 드론이 보내오는 열상 영상을 배율 하나씩 올려 가며 들여다봤다⁠.

화면 속 협동농장 마당에 전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대개는 시동을 끄고 식어 가는 중이라 회색으로 가라앉았는데⁠, 마당 한구석에서만 열이 흩어지지 않았다⁠. 한 대의 배기구에서 나온 열이 굵은 관을 따라 꺾여서 옆 차의 포탑 쪽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고장 난 차입니까⁠?⁠”

부관이 보온병 뚜껑에 차를 따르다 말고 물었다⁠.

“⁠고장 난 차는 식는다⁠. 저건 누가 배기를 모아서 뭔가를 말리고 있는 거다⁠.⁠”

소콜로프가 연필을 들었다⁠. 그는 표적 목록을 화면이 아니라 종이에 적었다⁠. 목록에는 자주포와 지휘 차량과 방공 레이더가 위에서부터 차례로 적혀 있었고⁠, 맨 아래에 한 줄이 늘었다⁠.

정비 — 위치 미상⁠.

“⁠전차가 마흔넷이라고 들었습니다⁠. 정비 트럭 한 대를 적을 칸이 있습니까⁠?⁠”

“⁠전차는 부서지면 끝이다⁠. 고치는 손이 있으면 끝이 안 난다⁠.⁠”

그는 손목의 초시계를 한 번 눌렀다가 멈췄다⁠. 열이 모이는 간격을 재 보려는 버릇이었다⁠.

“⁠끌까요⁠?⁠”

부관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소콜로프는 대답 대신 의자를 당겨 앉았다⁠. 모니터는 끄지 않았다⁠.

*

0040⁠, 첫 세 대에서 온도가 넘어 접착부가 밀렸다⁠. 한결은 흐물흐물해진 실리콘을 손톱으로 긁어 보고 나서 배기관 쪽 지그를 한 뼘 뒤로 물렸다⁠. 아홉 대가 남아 있었고⁠, 새벽까지 네 시간이었다⁠.

“⁠판 서⁠. 셋은 버립니까⁠?⁠”

“⁠아침에 다시 뜯으면 됩니다⁠. 지금은 남은 아홉이 먼저입니다⁠.⁠”

한결은 공구함을 열었다⁠.

1화는 어땠나요?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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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풍국2026.10.13· 1화

    폴란드에 K2 정비관이 남아 있었다는 게 실제로도 있을 법한 일인가요?

    • 네오작가2026.10.13

      한국이 폴란드에 K2 전차를 판 것과, 정비를 돕는 사람들이 함께 가는 것은 실제 일이에요. 그 뒤의 전쟁과 인물은 소설입니다.

  • 네오작가2026.10.09· 1화

    작가 네오입니다. 3차대전 3부작의 1부는 수바우키 회랑에서 시작합니다. 1화의 회랑을 읽고, 폴란드가 산 전차 옆에 남은 한국인 정비관의 선택을 어떻게 보셨나요? 수치는 예상 시나리오이며 사실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