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7,440자)

2화

조선의 첫 뱀파이어 · edel

끝없이 펼쳐진 어둠 아래로 산과 강이 흐렀고 희미한 달빛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산맥과 강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고국⁠, 조선이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전각 사이로 밤벌레의 울음이 들려왔다⁠.

도진은 강녕전(⁠康寧殿⁠) 지붕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조선의 왕 이안은 흔들리는 촛불 아래서 지도를 살피고 있었다⁠.

밀사를 보낸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들려오는 것은 배가 난파되었다는 절망적인 비보뿐이었다⁠.

“⁠도진아⁠, 정녕 네가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단 말이냐⁠?⁠”

왕의 깊은 탄식이 방 안을 무겁게 짓누르던 찰나 굳게 닫혀 있던 창문이 열리고 촛불이 힘없이 꺼졌다⁠.

여름의 서늘한 바람이 방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왕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전하⁠.⁠” 도진의 낮은 목소리⁠.

“⁠명을 받들지 못한 죄⁠, 죽여주시옵소서⁠.⁠”

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투명한 대리석 같았다⁠.

주군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는 시리게 빛나고 있었다⁠.

“⁠도진아··· 네 눈이⁠, 어찌 된 것이냐⁠?⁠”

“⁠소신⁠, 명나라의 땅에 닿지 못하였나이다⁠. 저주를 입어⁠, 괴물로 다시 태어났나이다⁠.⁠”

도진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괴물이라 하였느냐⁠?⁠”

왕은 도진의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자리에서 일어나 도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왕이 도진의 손을 잡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온기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전하⁠, 소신은 이제 해를 볼 수 없사옵니다⁠.⁠”

도진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생명의 피를 갈망하는 추악한 존재가 되었나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엎드려 주군에 대한 경외심을 표했다⁠.

“⁠부디··· 소신을 처단하여 주시옵소서⁠.⁠”

왕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려왔다⁠.

갈증을 참기 위해 도진의 온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왕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냄새가 도진의 이성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어금니가 으스러지도록 깨물며 본능을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왕은 도진의 턱을 잡아 올려 눈을 마주쳤다⁠.

“⁠피를 갈망하는 저주를 입고서도⁠, 죽음의 경계를 넘어 짐의 명을 잊지 않고 돌아왔느니라⁠. 그것이면 되었다⁠.⁠”

괴물이 아니라는 엄중한 선포였다⁠. 도진의 푸른 눈에 당혹감과 서글픈 충성심이 담겨 있었다⁠.

“⁠도진아⁠, 살아라⁠.⁠”

왕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그 한마디가 도진의 뛰지 않는 가슴을 세차게 난도질했다⁠.

“⁠···명을 받들겠나이다⁠.⁠”

왕은 서랍을 열어 붉은 비단에 싸인 단검 하나를 꺼냈다⁠. “⁠이 칼을 받으라⁠.⁠”

왕이 단검을 직접 쥐여주었고⁠, 도진은 묵묵히 칼을 받아 든 채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부터 너는 영월각에 머물라⁠.⁠”

“⁠명 받들겠나이다⁠.⁠”

‘⁠전하의 조선을 수호하겠나이다⁠.⁠’

산속 깊은 곳의 영월각(⁠迎月閣⁠)⁠. 한때는 왕과 도진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달을 보던 운치 있는 누각이었으나⁠, 이제는 세월에 방치되어 괴괴한 소문만 떠도는 폐각이 되어버린 곳이었다⁠.

짙은 흙내음과 습기를 머금은 이끼 냄새⁠.

어둠 속에서는 산짐승이 주변을 배회하는 작은 발소리들과 멀리서 부엉이의 울음이 들려왔다⁠.

예민해진 그의 감각에는 그 모든 소리가 한층 선명하게 들렸다⁠.

도진은 마침내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천천히 눈을 감았다⁠.

따스하게 웃던 나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현을 처음 만났던 4년 전의 기억이 스며들었다⁠. 1441년⁠, 꽃잎 흩날리던 봄날이었다⁠. 한양 도성 변두리의 인적 드문 숲길에 도화 꽃향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체탐인으로서의 고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도진은 어깨에 깊은 자상을 입은 채 비틀거리며 숲길을 걷고 있었다⁠.

남색 도포 자락은 이미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의 걸음마다 핏방울이 꽃잎 위로 툭툭 낙화했다⁠.

그때⁠, 아득해지는 정신 너머로 달콤한 향기가 도진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도화나무 아래 나현이 있었다⁠. 그녀는 바구니를 옆에 둔 채 조심스레 약초와 꽃잎을 따고 있었다⁠.

나현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도진을 바라보았다⁠.

피칠갑이 된 채 나무에 기대어 앉아 있는 사내⁠.

처음 마주한 사내인데도 나현은 이상하게도 그를 바라보는 순간⁠, 알 수 없는 떨림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나리⁠, 어찌 이리 다치셨습니까⁠.⁠”

나현의 하얀 손이 도진의 어깨에 닿는 순간⁠, 도진은 본능적으로 경계하며 손목을 낚아챘다⁠.

“⁠이대로 두시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맑은 눈망울로 도진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를 알고 있사옵니다⁠.⁠”

그 단호하면서도 따스한 나현의 목소리에 도진은 자신도 모르게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나현은 저고리 옷고름을 찢어 상처를 압박했고⁠, 약초를 짓이겨 정성스레 치료해 주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봄바람이 불어왔다⁠.

연분홍색 꽃잎이 어지러이 흩날렸다⁠.

도진은 고통 속에서 나현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꽃잎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가슴속으로⁠, 난생처음 따스한 봄바람이 비집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뼈는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입니다⁠. 함자가 어떻게 되십니까⁠?⁠”

그는 체탐인의 삶을 살고 있었기에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김도진이라 하오⁠.⁠”

“⁠도진 나리··· 저는 이나현이라 하옵니다⁠.⁠”

나현이 수줍게 웃으며 건넨 그 이름이 도진의 가슴에 깊이 박혔다⁠.

이나현⁠. 평생 그림자처럼 살아온 자신의 에 처음으로 따스한 빛이 스며든 것 같았다⁠.

그날⁠, 도진은 자신의 삶에 처음으로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후 몇주가 흘렀지만 도진은 나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영월각은 도진에게 은신처이자⁠, 감옥이 되었다⁠.

그날 오후 도진은 햇빛을 피해 서책을 읽고 있었다⁠.

인간일 적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예민한 감각⁠. 담장 너머 풀벌레의 거친 날갯짓 소리⁠, 장사꾼의 터벅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멀리서 들려오는 나현의 인기척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끝내 문을 열지 못했다⁠. 분명 예전과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핏기 없이 창백해진 피부⁠, 푸른 눈동자⁠, 그리고 피냄새를 맡는 순간 돋아나는 송곳니⁠.

무엇보다 가장 두려운 것은 그녀의 앞에 서는 순간 갈증을 참지 못하고⁠, 끝내 제 손으로 정인을 해치게 될까 봐 도진은 두려웠다⁠.

같은 시각⁠, 볕이 드는 툇마루에 나현이 홀로 앉아 있었다⁠. 어릴 때부터 몸에 밴 단정한 몸가짐과 긴 눈매 아래로 떨어지는 고요한 시선⁠.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는 청초함이 고스란히 묻어 났다⁠.

“⁠나리께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셨단 말인가⁠.⁠.⁠.⁠”

바람에 실려 온 그녀의 나직한 탄식이 인간이었을 적이라면 결코 닿지 않았을 먼 거리였으나 또렷하게 들려왔다⁠.

‘⁠나현 낭자⁠, 너무 보고 싶구려⁠.⁠’

그때였다⁠. 숲이 이상하리만큼 고요해졌다⁠.

지저귀던 새소리마저 뚝 끊겼고⁠, 정적을 깨며 맹수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짐승이 아니었다⁠. 거대한 호랑이⁠, 산군(⁠山君⁠)이었다⁠.

쿵⁠. 쿵⁠. 쿵⁠. 대지를 울리는 맹수의 거대한 발소리와 포효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맹수의 발소리가 나현이 있는 툇마루 쪽을 향해 가깝게 좁혀오고 있었다⁠.

“⁠안 돼···⁠!⁠”

도진의 이성이 끊어졌다⁠.

태양에 몸이 타들어 갈 것이라는 두려움도⁠, 나현에게 자신의 괴물 같은 모습을 들켜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나현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으아악⁠!⁠!⁠”

문을 박차고 나서는 순간⁠, 여름의 뜨거운 햇빛이 도진을 덮쳤다⁠.

얼굴과 목덜미의 피부가 순식간에 타들어 갔다⁠.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현이 위험했다⁠. 비명마저 삼키며 거침없이 산길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맹수가 코앞까지 다가온 그 순간⁠, 검은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도진이 나타났다⁠.

나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찰나 도진은 호랑이의 목덜미를 단단히 붙잡았다⁠.

맹수는 거칠게 몸부림쳤지만 도진의 손아귀에서는 꼼짝도 못했다⁠.

도진은 손아귀에 힘을 주며 나현을 바라보았다⁠.

가장 보여주기 싫었던 정인에게 괴물의 모습을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그녀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함만큼은 숨길 수가 없었다⁠.

이내 거칠게 몸부림치던 맹수의 숨통이 끊어졌다⁠.

그럼에도 도진에게 중요한 것은 단 하나였다⁠.

나현이 무사하다는 것⁠.

“⁠괜찮으시오⁠?⁠”

그녀를 살렸다는 안도감과⁠, 수치심이 동시에 찾아왔다⁠.

햇빛 아래 검게 그을려 타들어 가는 피부⁠, 푸른 눈으로 그토록 보고 싶던 정인을 마주했다⁠.

“⁠나리···⁠?⁠”

나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토록 매일 밤 눈물로 지새우며 기다렸던 정인이었다⁠.

“⁠정녕··· 나리이십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지독한 그리움으로 젖어 들었다⁠.

그때⁠, 담장 너머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저기 보시오⁠!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았소⁠!⁠”

“⁠사람 눈빛이 어찌 저리 푸른가⁠?⁠”

“⁠사람이 아니야⁠, 괴물이다⁠!⁠!⁠”

도진은 숨이 끊어진 호랑이를 들쳐업고 다시 숲으로 사라졌다⁠.

어둡고 서늘한 동굴 안⁠, 햇빛을 피하자마자 참았던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으윽···⁠.⁠”

그제야 고통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도진은 가만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토록 그리워했으면서⁠, 막상 마주한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도망치고 싶었다⁠. 그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자신은 이제 다시는 낮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음을⁠.

그녀의 따스한 온기를 두 번 다시 품을 수 없음을⁠.

나현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눈앞에 나타났던 도진의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햇빛에 검게 그을린 얼굴⁠, 타들어 가던 손등⁠.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던 정인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많이 다치신 것은 아닐까······⁠.⁠’

해가 기울고 숲에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그를 향한 걱정과 사무치도록 깊어진 그리움으로 나현은 망설임 없이 횃불 하나만을 손에 쥔 채⁠, 도진이 사라진 뒷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는 어느새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숨겼고⁠, 산속에는 짙은 어둠이 순식간에 내려앉았다⁠.

“⁠나리···⁠! 나리⁠, 어디 계십니까···⁠!⁠”

동굴을 빠져 나와 영월각으로 돌아가던 중 도진의 발걸음이 멈춰 섰다⁠.

“⁠도진 나리⁠!⁠” 산 아래쪽에서 바람을 타고 올라오는 그녀의 서러운 목소리와 떨리는 숨소리가 그의 예민한 감각을 파고들었다⁠.

‘⁠낭자···⁠?⁠’

도진은 산 중턱에 서서 아래를 굽어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작은 횃불 하나가 위태롭게 번져오고 있었다⁠.

나현은 자신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험한 산을 올라오고 있었다⁠.

‘⁠돌아가시오⁠.⁠’

도진은 속으로 낮게 중얼거렸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돌려보내야 했지만⁠, 멀리서라도 조금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발걸음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이었다⁠.

“⁠아······⁠!⁠” 언덕을 오르던 나현의 발이 돌뿌리에 걸려 미끄러졌다⁠.

손에 쥐고 있던 횃불이 바닥을 구르다 이내 툭 꺼져버렸다⁠.

도진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바람을 타고 달콤한 향기가 도진의 코끝을 스쳤다⁠.

나현의 피 향기⁠, 그 향기는 강렬한 유혹이자 동시에 고문이었다⁠.

“⁠나현 낭자⁠.⁠.⁠.⁠” 도진의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느새 넘어져 있는 나현을 향해 달려간 도진은 그녀의 팔을 붙잡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괜찮소⁠?⁠”

옷자락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주는 그의 손길은 다정했으나⁠, 이내 도진은 한 걸음 물러섰다⁠.

나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나리······⁠.⁠”

“⁠······더 이상 가까이 오지 마시오⁠.⁠”

한 걸음 더 물러난 그의 푸른 눈이 미세하게 떨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달빛 아래 도진의 얼굴에 그을린 붉은 상처가 보였다⁠.

“⁠그저 나리가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돌아가시오⁠.⁠”

“⁠싫습니다⁠.⁠”

“⁠나는 괴물이 되었소⁠. 생명의 피를 마셔야만 사는······⁠!⁠”

“⁠제 목숨을 구해주려 오셨잖습니까⁠, 저를 해칠 리 없다는 것쯤은 압니다⁠.⁠”

“⁠난 상처 따위 중요치 않소⁠.⁠”

“⁠······많이 아프십니까⁠? 나리가 다치셨는데⁠, 어찌 돌아가겠습니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현이 도진의 커다란 손을 움켜잡았다⁠.

상처가 서서히 아물어가고 있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스치는 체온조차 아깝고 서러웠지만⁠, 도진은 차갑게 손을 뿌리쳤다⁠.

그의 손목에서 나현은 붉은 명주실 매듭을 발견했다⁠.

자신이 직접 묶어주었던 그 매듭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리께서는······ 아직도 이것을 하고 계셨습니까⁠?⁠”

“⁠······버릴 이유가 없소⁠.⁠”

“⁠이제 그만 돌아가시오⁠. 집까지 데려다주겠소⁠.⁠”

“⁠싫습니다⁠.⁠”

“⁠…⁠…붙잡지 마시오⁠.⁠”

도진이 고개를 돌리며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고문이오⁠. 내가 낭자를 물어버릴 수도 있소⁠.⁠”

“⁠저는 이미 나리의 손에 한 번 살아난 목숨입니다⁠. 죽는 것이 무서웠다면⁠, 감히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나현은 한 걸음 다가가 그를 바라보았다⁠.

“⁠가지 않을 것입니다⁠. 못 떠납니다⁠.⁠”

순간⁠, 도진의 손이 나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단단한 손가락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감쌌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손목을 코끝 가까이 가져갔다⁠.

“⁠미쳤군⁠.⁠”

“⁠알고 있사옵니다⁠.⁠”

“⁠후회할 거요⁠.⁠”

“⁠안 합니다⁠. 나리와 함께라면⁠.⁠”

도진의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애틋하고 서글픈 미소가 번졌다⁠.

그는 나현의 허리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꽉 잡으시오⁠.⁠”

“⁠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끝이 땅에서 떨어졌다⁠.

밤하늘로 떠올랐다⁠.

검은 도포 자락이 밤바람에 펄럭였고⁠, 발아래로 숲과 강줄기가 길게 이어졌다⁠.

나현이 도진의 옷깃을 바짝 움켜쥐었다⁠. 고개를 조금만 숙이면 닿을 거리⁠,나현의 무릎에서 배어 나오는 달콤한 피 향기가 끊임없이 도진의 본능을 자극했다⁠.

도진은 어금니를 깨물며 숲을 스쳐 지나던 순간⁠, 배롱나무 꽃가지 하나를 거칠게 꺾어 들었다⁠.

꽃가지를 코끝에 바짝 대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이성을 마비시키는 피 향기 대신⁠, 쌉싸름하고 은은한 꽃 향기를 맡으며 본능을 안간힘을 다해 짓눌렀다⁠.

‘⁠나를 미치게 한 것은 정인의 피 향기였으나⁠, 나를 다시 이성으로 돌려놓은 것 또한 정인에게 주고자 꺾은 이 꽃 한 가지였소⁠.⁠’

순식간에 나현의 집 앞마당에 도착했다⁠.

도진은 나현을 툇마루에 조심스럽게 앉힌 뒤⁠, 애절한 분홍빛의 배롱나무 가지를 그녀의 무릎 위에 살포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곧바로 한 걸음 두 걸음 물러섰다⁠. 더 가까이 있다가는 정말로 자신을 통제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는······ 나를 찾지 마시오⁠. 이것이 마지막 자비오⁠.⁠”

“⁠도진 나리⁠!⁠”

나현의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붙잡았지만⁠, 도진은 어금니를 악물고 본능을 억누르며 몸을 돌렸다⁠.

순간⁠, 그의 모습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현은 문득 자신의 무릎 위를 내려다보았다⁠.

배롱나무 꽃가지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며 꽃가지를 소중히 움켜쥐었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입니다

작가를 구독하면 다음 화가 올라올 때 알려 드립니다.

2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

2화 · 조선의 첫 뱀파이어 · 나오늘 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