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613자)

1화

조선의 첫 뱀파이어 · edel

조선 최고의 체탐인(⁠細探人⁠)⁠, 김도진⁠. 그는 왕의 벗이자 그림자였다⁠.

그는 조선의 안보에 직결되는 기밀을 수집하며 조선의 '눈과 귀'가 되어 사선(⁠死線⁠)을 넘나들며⁠, 적의 정보를 캐내고 조선의 안보를 지켰다⁠. 그의 피부는 백자처럼 투명하고 하얬으나⁠, 이목구비는 야수의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그의 짙은 갈색의 눈망울은 투명하여 어딘가 슬퍼 보였다⁠.

굵고 선명하게 그어진 눈썹 아래로 길게 늘어진 속눈썹이 그늘을 드리울 때마다⁠, 그 눈빛은 묘한 신비함마저 품어냈다⁠.

날렵하게 곧게 뻗은 콧날⁠, 살짝 닫힌 입술은 피를 머금은 듯 붉은 입술은 차가운 외모에 묘한 생기를 더했다⁠.

1440년⁠. 도진은 홀로 절벽 끝에 웅크린 채 여진족의 부락을 내려다보았다⁠.

품 안에는 명나라 황실의 밀서가 들어있었다⁠.

이것을 살아서 주군께 전달하느냐⁠, 혹은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음으로 비밀을 지키느냐⁠.

도진이 활시위를 당기자 화살은 적의 목덜미에 정확히 박혔고⁠, 여진의 철기군 한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도진의 미소는 잔인하도록 매혹적이었다⁠.

체탐인의 전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장엄한 고함도⁠, 승전의 환호도 없는 난도질⁠.

1441년⁠.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도진은 대원들과 함께 몸을 낮추었다⁠.

“⁠도진아⁠, 한양 돌아가면 주막에서 장국밥에 탁주 한 잔 사마⁠.⁠”

석칠의 농담에 도진은 단검을 고쳐 쥐며 무심하게 답했다⁠.

“⁠형님이나 살아 돌아갈 걱정이나 하시오⁠.⁠”

적의 횃불이 바짝 다가왔다⁠. 조장의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다섯 개의 그림자가 눈밭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했다⁠. 한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그녀를 위해⁠.

현재 1445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강녕전⁠.

“⁠도진아⁠.⁠” 나직하지만 태산 같은 위엄이 서린 목소리⁠. 조선의 주군⁠, 이안이 그를 불렀다⁠.

도진은 무릎을 굽혀 왕의 앞에 앉았다⁠.

“⁠북방의 기운이 심상치 않다⁠. 명나라로 향하는 해로마다 여진의 첩자들이 독니를 세우고 기다린다는 전언이다⁠. 이 밀서를 명의 사신에게 전하라⁠.⁠”

도진은 두 손으로 밀서를 받쳐 들었다⁠.

“⁠전하⁠, 소신··· 목숨을 다해 명을 받들겠나이다⁠.⁠”

왕은 물러가는 도진의 뒷모습을 오래도록 응시했다⁠.

“⁠꼭 살아 돌아오라⁠.⁠”

어둠이 짙게 깔린 나루터⁠. 도진은 거대한 배에 몸을 실었다⁠.어둠 속에서 웅장한 돛이 펄쳐졌다⁠. 거센 풍랑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만큼 크고 견고한 배였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거대한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칠흑 같은 바다 위배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하늘이 성난 것처럼 먹구름을 잔뜩 머금고 번개를 내뿜었다⁠.

비가 사선으로 사정없이 쏟아지며⁠,바다와 하늘의 경계를 허물었다⁠.

집채만 한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밀려 들었고⁠, 거대한 선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비바람이 도진의 뺨을 사정 없이 때렸지만⁠, 그는 밧줄을 바짝 거머쥐며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품속을 가만히 더듬었다⁠.

밀서를 명나라 사신에게 전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었다⁠.

돛이 찢겨 나가고⁠, 선원들은 공포에 떨며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깊은 심연으로 향하는 통로처럼 배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문득 그를 향했던 전하의 아득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아직은······ 죽을 수 없다⁠!⁠”

그의 맹세가 비바람 속으로 흩어졌다⁠. 번개가 번쩍이는 순간⁠, 도진의 몸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은 익숙한 북극성이 아니었다⁠.

서늘한 별자리들이 그를 비웃듯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전하의 명을 다하지 못하였는데···⁠.⁠’

차가운 바닷물이 온몸을 감쌌다⁠. 도진은 물 위에 떠 있던 부서진 목판을 필사적으로 껴안으며 몸을 맡겼다⁠.

얼마나 그렇게 떠밀려왔을까⁠.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아이슬란드⁠, 비크의 밤하늘 위로 물감이 흘러내리는 듯 하늘을 가득 메우며 퍼져나간 에메랄드빛 속에서⁠, 주황빛과 보라색 비단실이 공중으로 번져 나가듯 넘실넘실 춤을 추며⁠, 연두색과 주황색의 빛들이⁠, 마치 밤하늘을 헤엄치는 듯했다⁠.

그 기묘한 빛 아래⁠, 차가운 바닷물에 젖은 채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아름다운 오로라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처참한 몰골⁠. 갈가리 찢긴 젖은 옥색 도포⁠, 상투는 풀어 헤쳐져 시신처럼 누워 있었다⁠.

도진이었다⁠.

파도가 절벽에 부딪혔다⁠. 절벽 위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소리도 없이 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는 밤의 빛마저 삼킬 듯 어두웠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치맛자락 끝에서 마치 핏자국처럼 짙은 버건디 빛이 은밀하게 드러났다⁠.

인간이라기엔 지나치게 창백한 피부⁠, 붉은 입술을 가진 여인의 눈이 번뜩였다⁠.

고요한 바다에는 단지 의식을 잃은 도진과 그녀만이 존재했다⁠.

그녀는 소리도 없이 절벽을 타고 내려와 쓰러져 있는 도진의 곁으로 다가갔다⁠. 죽음의 문턱에서도 그는 기품을 잃지 않았다⁠.

그녀는 도진의 고귀한 미모에 홀린 듯⁠, 손가락을 뻗어 그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토록 고결한 영혼이라니⁠. 죽게 내버려 두기엔 너무 아깝구나⁠.⁠”

갓은 소실된지 오래였고⁠, 비바람에 젖어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이 하얀 이마와 뺨에 달라 붙어 있었지만⁠, 그가 가진 고결한 분위기까지 해치지는 못했다⁠.

그녀의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났고 망설임 없이 도진의 목덜미를 깊게 물었다⁠.

“⁠으윽···⁠” 제대로 된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도진의 몸 속에서 뜨거운 피가 빠르게 빠져나갔다⁠.

얼음보다 차갑고 불길보다 강렬한 불멸의 저주가 주입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영원히 죽지 못하는 저주였다⁠.

그녀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요히 사라졌다⁠.

마른하늘에 천둥과 함께 도진의 심장이 단 한 번⁠, 거세게 요동쳤다⁠.

섬광과 함께 칠흑같이 어두웠던 바다가 환하게 밝혀졌다⁠.

웅장한 천둥소리에 도진이 간신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이 흑갈색에서 푸른빛으로 변해있었다⁠. 검은 모래사장과 그 위를 화려하게 수놓는 천상의 빛⁠, 오로라⁠. 그 경계에서 도진이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천국인가⁠?⁠”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기이할 만큼 아름다웠다⁠.

도진이 바라본 밤하늘은 완벽한 천국 그 자체였다⁠.

오로라의 빛들이 마지막 춤을 추는 동안⁠, 도진은 오래도록 눈을 감지 못했다⁠.

도진은 창백하게 변해버린 손을 내려다 보았다⁠. 손목을 감싸고 있는 것은 나현이 묶어주었던 붉은 명주실이었다⁠.

‘⁠이 붉은 실이 우리를 이어줄 것입니다⁠. 이 실을 따라 꼭 제게 돌아오셔야 합니다⁠.⁠’

나현의 아련한 목소리가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았다⁠.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눈에는 저 멀리 절벽의 갈라진 틈과 모래 한 알까지 소름 돋도록 선명하게 들어왔다⁠.

숨을 들이마시자 짙은 바닷내음 너머로 젖은 해초 향과 절벽의 이끼 냄새⁠, 산맥 너머 만년설의 차가운 향기까지 코끝을 스쳤다⁠.

그 순간⁠, 아주 미세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쿵⁠.쿵⁠.쿵⁠.⁠’ 저 멀리서 들리는 심장 소리⁠.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목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끼며 그가 한발 내디뎠다⁠. 한 발 내디뎠다⁠. 분명 단 한 걸음이었으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절벽 위에서 도진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였다⁠.

밤하늘 사이로 북극성이 보였고⁠,몸을 날리자 대지가 순식간에 발아래로 까마득해졌다⁠.

완전한 비행은 아니었으나⁠, 몸은 본능적으로 바람의 결을 다루는 법을 익혀 가고 있었다⁠.

“⁠···⁠!⁠”

착지하려 땅을 디디면 그 반동으로 다시 하늘로 떠올랐다⁠.

한 번의 도약에 수십 장을 날아갔고⁠, 발끝이 땅에 닿기도 전에 다음 공간을 차올랐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이었다⁠. 자신조차 낯선 그 힘은 두려움보다 해방감을 선사했다⁠.

그날 밤부터 도진은 끊임없이 달리고 날아올랐다⁠.

밤새 험준한 산맥을 밤새 수도 없이넘었음에도 숨이 차오르지도 않았다⁠.

어느 순간 도진의 시야가 바뀌었다⁠. 시베리아의 차가운 설원 위로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태양 빛이 손에 닿는 순간⁠, 견딜 수 없는 통증과 함께 살점이 검게 그을려 갔다⁠.

“⁠앗⁠!⁠”

견딜 수 없는 처음 겪어 보는 통증이었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그늘을 향해 몸을 던졌다⁠.

눈더미를 깨뜨리고 그 속으로 파고들었다⁠.

빛이 차단되고 나서야 비로소 몸을 웅크릴 수 있었다⁠.

숯처럼 까맣게 타들어 가던 살점은 눈앞에서 다시 돋아나며⁠, 백자처럼 매끄럽고 창백하게 빛났다⁠.

“⁠이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천천히 눈이 감겼다⁠. 의식이 희미해지자⁠, 조선에서의 기억이 밀려왔다⁠.

남산의 아늑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뭇잎 사이로 부서지던 따스한 햇살⁠, 싱그러운 풀 내음과 갓 구운 떡의 달큼한 향기⁠.

‘⁠도진아⁠, 이리 와서 좀 쉬거라⁠. 오늘따라 볕이 참 좋구나⁠.⁠’

어머니의 다정한 목소리였다⁠.

분명 그때의 햇살은 생명이었고⁠, 축복이었다⁠.

이어 한양 외곽의 작은 연못가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또 떠나시는군요⁠.⁠’

‘⁠무사히 돌아오시면··· 그때는 꽃이 지기 전에 정식으로 제 이름을 불러 주시겠습니까⁠?⁠’

나현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온기가 남아 있던 손등과⁠, 뺨에 부드럽게 닿았던

입술의 감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현아······⁠.⁠”

그 이름이 차가운 어둠 속으로 덧없이 흘러나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태양이 사라지자 도진은 다시 나아갔다⁠.

낮은 지옥이었고⁠, 밤은 해방이었다⁠. 온기를 주던 다정한 햇살이었건만⁠, 이제는 누릴 수 없는 저주가 되었다⁠.

태양이 떠오르면 얼어붙은 대지 아래 몸을 숨겼고⁠, 어둠이 내리면 다시 바람처럼 달렸다⁠.

험준한 산맥을 쉬지 않고 넘은지 열흘이 지났다⁠. 억눌러온 갈증이 마침내 한계를 넘어섰다⁠.

“⁠목이··· 너무 마르는구나⁠.⁠”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이었다⁠. 수백 미터 밖에서 무언가의 심장 박동이 들렸다⁠.

단순한 두근 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눈밭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사방으로 터져 나간 눈가루가 시공간이 멈춘 듯 하얀 눈 결정이 또렷하게 보였다⁠.

육각의 보석처럼 정교하게 갈라진 얼음의 가지들⁠, 공중에 떠 있는 눈의 결정이 반짝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도진은 늑대의 목덜미를 단숨에 낚아챘다⁠.

푸른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생명의 향기에 날카로운 송곳니가 늑대의 목덜미에 깊숙이 박혔다⁠.

“⁠미안하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구나⁠.⁠”

뜨거운 피의 비린 맛 뒤로⁠, 달콤한 생명의 온기가 갈증을 적셨다⁠.

폭발적인 힘이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갔다⁠.

첫 사냥의 전율이었다⁠. 한참 뒤 정신을 차렸을 때⁠, 도진의 손에는 온기가 식지 않은 늑대의 사체가 들려 있었다⁠.

“⁠내가··· 무슨 짓을······⁠.⁠”

도진은 사체를 내려놓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그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을 똑똑히 깨달았다⁠.

자신은 이제 피를 마시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저 주군의 명을 따라 바다를 건넜을 뿐이었다⁠.

원치 않는 잔인한 운명 앞에서 뼈를 깎는 심정으로 후회했다⁠.

“⁠차라리 그 차디찬 바닷속에 깊이 잠겨버렸다면 좋았을 것을⁠.⁠”

그럼에도 돌아가야 했다⁠. 돌아갈 곳은 오직 하나⁠, 조선이었다⁠. 나현이 있는 곳⁠.

‘⁠어여쁜 너에게⁠, 이 서늘한 손을 댈 수 있을까⁠. 이런 모습으로⁠, 다시 너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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