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53자)
448,000
고별운행 · 이수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물아홉 해를 함께 달린 트럭을 보내며 앞유리에 편지를 남긴 한 분의 이야기에서 왔습니다. 인물의 이름과 집안 이야기는 지어냈습니다.
새벽 네 시 십 분에 눈이 떠졌다.
알람은 맞춰 두지 않았다. 맞춰 둘 일이 없어진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몸이 아직 모른다. 정재복은 어둠 속에서 천장을 한참 올려다봤다.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오른손으로 기어를 쥐고 왼팔은 창틀에 걸치고 다녔더니, 이제는 그냥 누워 있어도 몸이 저 혼자 그 자세를 만든다. 운전대만 없을 뿐이다.
옆에서 아내가 자고 있었다. 아내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난다. 사십 년째 그렇다. 정재복이 새벽 네 시에 나가고 아내가 여섯 시 반에 일어나니, 두 사람은 사십 년 동안 아침을 같이 먹은 날이 손에 꼽는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일어났다.
*
주방 냉장고 문에 딸이 붙여 놓은 종이가 있다. 「아버지 혈압약 아침! 밥 먹고!」 느낌표가 두 개다. 삼 년 전에 붙인 건데 아직 색이 안 바랬다. 요즘 종이는 좋다.
그 옆에 달력이 걸려 있다. 은행에서 준 달력. 숫자가 크게 나온 것이라 눈이 어두워도 잘 보인다. 구월이 된 지 며칠 됐는데 팔월 장이 아직 안 뜯겨 있다. 정재복은 달력을 넘기지 않는 사람이다. 아내가 넘긴다. 아내가 안 넘기면 그 집은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지난달에 산다.
물을 한 컵 마시고 거실 서랍을 열었다.
*
통장들 밑에 갈색 서류 봉투가 있다. 겉에 볼펜으로 「차」라고만 적혀 있다. 그가 쓴 글씨다. 스물아홉 해 전에.
안에서 나온 것은 자동차등록증이었다. 종이가 누렇다 못해 손끝에 닿는 느낌이 천 같았다. 접힌 자리는 여러 번 갈라졌다가 셀로판테이프로 붙어 있었고, 그 테이프도 이제 누렇게 삭았다.
제97-095812호.
그 아래, 인쇄된 칸 위에 손으로 적은 글씨가 있다.
최초등록일: 년 97 월 10 일 28.
「년」과 「월」과 「일」이 먼저 인쇄되어 있고 그 사이사이에 누가 숫자를 채워 넣은 것이다. 요즘은 저렇게 안 한다. 요즘은 전부 기계가 찍는다. 그때는 등록소 직원이 볼펜을 들고 앉아서 한 사람씩 손으로 적어 줬다. 그 직원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볼펜이 안 나와서 두 번 흔들어 잉크를 내리던 것은 기억난다.
1997년 10월 28일.
그날 아침에 자기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생각났다. 회색 잠바. 지퍼가 반쯤 고장 나서 올리다 보면 중간에 걸리는 잠바였는데, 그날은 새 차를 받으러 가는 날이라 그걸 입고 갔다. 그게 제일 나은 옷이었다.
*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었다.
"예, 성원폐차장입니다."
젊은 목소리였다. 뒤에서 쇠 자르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벌써.
"폐차 하나 하려는데요."
"차종이 어떻게 되세요?"
"포터요."
"연식은요?"
"구십칠 년."
수화기 저쪽이 잠깐 조용해졌다.
"…구십칠 년이요? 아버님, 그거 아직 굴러가요?"
"굴러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젊은 목소리가 웃었다.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요즘 그 연식이 잘 안 들어와서요. 주행거리는 얼마나 되세요?"
"사십사만 팔천."
"예?"
"사십사만 팔천 킬로."
또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아버님, 그거 진짜예요?"
"계기판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사고 이력은요?"
"없어요."
"무사고요? 사십사만에?"
"예."
"허."
젊은 사람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정재복은 그 소리가 싫지 않았다. 자랑할 데가 없어서 안 했을 뿐이지, 자랑거리가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장은요? 큰 수리 하신 거 있으세요?"
"없어요."
"…엔진이나 미션이나."
"없어요."
"아버님." 젊은 목소리가 이번에는 진짜로 웃었다. "그 차 폐차하지 마시고 박물관에 가져다 놓으세요."
정재복도 조금 웃었다. 웃고 나서, 왜 웃었나 싶었다.
날짜를 잡았다. 사흘 뒤 오전 열 시. 직접 몰고 오셔도 되고 견인차를 보내 드려도 된다고 했다. 직접 가겠다고 했다.
"그럼 등록증하고 신분증 챙겨 오시고요, 번호판은 저희가 떼서 반납합니다. 그리고 차 안에 물건 다 빼셔야 돼요. 나중에 찾으러 오셔도 이미 압축돼 있어서요."
압축.
정재복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그 말을 한참 들고 있었다. 압축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그 말을 자기 차에 붙여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차가운 기름 냄새가 났다.
B동 기둥 옆, 늘 대던 자리에 그 차가 있다. 감청색 포터. 색은 이제 감청색이라고 부르기가 좀 미안하다. 지붕은 햇빛에 삭아 하얗게 일어났고, 앞 범퍼 오른쪽은 사 년 전 시장 골목에서 벽에 긁혔다. 그건 사고로 안 친다. 벽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짐칸 나무 바닥에는 빵 상자 자국이 그대로 있다. 플라스틱 상자를 스물아홉 해 동안 밀어 넣고 빼고 했더니 상자 폭만큼 나무가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자로 잰 것처럼 줄이 나 있다. 저 줄 하나하나가 다 새벽이었다.
정재복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문은 늘 그렇듯 두 번째 소리에 열렸다. 첫 번째는 삐걱, 두 번째는 턱.
앉으니 몸이 저절로 맞았다. 이십구 년 동안 이 사람 하나만 앉아서 스펀지가 그의 모양대로 꺼져 있다. 엉덩이 자리도, 등 자리도, 왼쪽 팔꿈치가 닿는 문짝 위쪽도. 다른 사람이 앉으면 불편할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차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한테만 편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열쇠를 꽂았다. 요즘 차는 열쇠를 안 꽂는다고 아들이 그랬다.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돌렸다.
부르릉― 한 번에 걸렸다. 스물아홉 해 동안 한 번에 안 걸린 날이 손에 꼽는다. 그것도 영하 십오 도 아래로 내려간 날들뿐이었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448,0 그리고 뒤에 두 칸.
지구 둘레가 사만 킬로미터라고 딸이 언젠가 말했었다. 그러니까 이 차는 지구를 열한 바퀴 돌았다. 열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 사람은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왔고, 그 사이에 아이 둘이 자라서 학교를 마치고 독립했다.
아이들은 지구를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이 차는 열한 바퀴를 돌았다.
*
사람들은 왜 보내느냐고 물으면 으레 고장이 났겠거니 한다.
고장은 안 났다. 스물아홉 해 동안 한 번도 안 났다.
문제는 밑이었다. 지난봄에 정비소에서 차를 올려놓고 사장이 손전등으로 밑을 비추더니 말없이 한참 있었다. 그러고는 드라이버 손잡이로 문짝 아래쪽을 톡톡 쳤다. 소리가 이상했다. 사장이 그 자리를 손톱으로 긁으니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철판이 아니라 과자 같았다.
"어르신, 여기 이미 뚫렸어요."
"때우면 되잖아."
"때우면 옆이 뚫려요. 밑이 다 이래요."
"부품 갈면―"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 나이 차 부품은 이제 안 나온다고 했다. 어디서 폐차 들어온 걸 뜯어다 쓰는 수밖에 없는데, 그 폐차도 이제 안 들어온다고.
정재복은 그 말을 알아들었다. 엔진은 멀쩡하다. 미션도 멀쩡하다. 이 차는 아직도 시동 한 번에 걸리고 오르막을 밀어 올린다. 그런데 몸이 삭았고, 삭은 몸을 갈아 끼울 방법이 세상에 없어졌다.
이 차가 그를 버린 것이 아니다. 세상이 부품을 그만 만든 것이다.
*
살 때 약속을 했었다.
1997년 10월 28일, 등록증에 손으로 적힌 그 날짜에, 그는 새 차 앞에 서서 속으로 한 마디 했다. 소리 내서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너 안 버릴 테니까, 너도 나 버리지 마라. 우리 같이 가자.
그리고 그 약속을 그는 손으로 지켰다. 말로 지킬 줄을 몰라서 손으로 지켰다. 정비소에서 하라는 것보다 오일을 늘 한 번씩 더 갈아 줬다. 짧게 서고 짧게 가는 차가 엔진에 제일 나쁘다는 걸 알고부터는 더 그랬다. 남들이 만 킬로에 간다고 하면 그는 오천에 갈았다. 돈이 아까울 때도 그것만은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스물아홉 해 동안, 이 차는 그를 길에 세워 둔 적이 한 번도 없다.
한 번도 없다.
*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들이었다.
"아버지, 주무셨어요?"
"어."
"저 잠깐만요―" 저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들은 늘 전화를 걸어 놓고 다른 일을 한다. "제가 링크 하나 보냈는데 보셨어요?"
"안 봤다."
"전기차요. 보조금 나와서 생각보다 안 비싸요. 아버지 이제 짐 실을 일도 없으시잖아요. 승용차로―"
"봤다."
"방금 안 보셨다면서요."
"…어제 온 거 말하는 거면 봤다."
"아버지, 그 차 삼십 년 됐어요."
"이십구 년."
"그게 그거죠."
그게 그거가 아니다. 정재복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이십구 년과 삼십 년은 다르다. 한 해가 다르면 그 안에 든 것이 통째로 다르다. 그런데 그걸 설명하려면 스물아홉 해를 다 설명해야 해서, 그는 늘 여기서 입을 다문다.
"사흘 뒤에 폐차한다."
"…예?"
"성원폐차장. 열 시."
"아버지, 진짜요? 아니 왜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지금 하잖아."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됐다. 내가 몰고 간다."
"아버지."
"내가 몰고 간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재복은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걸 알았다. 아들한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
집에 올라와 보니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국을 데웠다. 그 사람은 사십 년째 그렇다. 물어야 할 것과 안 물어야 할 것을 귀신같이 안다.
정재복은 밥을 먹고, 혈압약을 먹고,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냉장고 쪽으로 갔다.
달력을 걷어 냈다.
팔월 장을 뜯어서 뒤집었다. 뒷면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흰 종이였다. 넓었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었다.
아내가 등 뒤에서 물었다.
"뭐 하시게요."
"아무것도 아니야."
정재복은 매직펜을 찾으러 서랍을 열었다. 펜은 세 자루가 있었는데 두 자루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한 자루를 종이 귀퉁이에 그어 보니, 처음에는 안 나오다가 두 번 흔드니까 잉크가 내려왔다.
스물아홉 해 전 그 등록소 직원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흰 종이를 앞에 놓고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겠는데, 평생 그런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시작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한참 있다가, 그는 맨 위에 다섯 글자를 크게 썼다.
고 별 운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