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70자)

448,000

고별운행 · 이수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스물아홉 해를 함께 달린 트럭을 보내며 앞유리에 편지를 남긴 한 분의 이야기에서 왔습니다⁠. 인물의 이름과 집안 이야기는 지어냈습니다⁠.

새벽 네 시 십 분에 눈이 떠졌다⁠.

알람은 맞춰 두지 않았다⁠. 맞춰 둘 일이 없어진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몸이 아직 모른다⁠. 정재복은 어둠 속에서 천장을 한참 올려다봤다⁠. 왼쪽 어깨가 뻐근했다⁠. 스물아홉 해 동안 오른손으로 기어를 쥐고 왼팔은 창틀에 걸치고 다녔더니⁠, 이제는 그냥 누워 있어도 몸이 저 혼자 이 자세를 만든다⁠. 운전대만 없을 뿐이다⁠.

옆에서 아내가 자고 있었다⁠. 아내는 여섯 시 반에 일어난다⁠. 사십 년째 그렇다⁠. 정재복이 새벽 네 시에 나가고 아내가 여섯 시 반에 일어나니⁠, 두 사람은 사십 년 동안 아침을 같이 먹은 날이 손에 꼽는다⁠. 정재복은 소리 나지 않게 일어났다⁠.

*

주방 냉장고 문에 딸이 붙여 놓은 종이가 있다⁠. 「⁠아버지 혈압약 아침⁠! 밥 먹고⁠!⁠」 느낌표가 두 개다⁠. 삼 년 전에 붙인 건데 아직 색이 안 바랬다⁠. 요즘 종이는 좋다⁠.

이 옆에 달력이 걸려 있다⁠. 은행에서 준 달력⁠. 숫자가 크게 나온 것이라 눈이 어두워도 잘 보인다⁠. 구월이 된 지 며칠 됐는데 팔월 장이 아직 안 뜯겨 있다⁠. 정재복은 달력을 넘기지 않는 사람이다⁠. 아내가 넘긴다⁠. 아내가 안 넘기면 이 집은 두 달이고 석 달이고 지난달에 산다⁠.

물을 한 컵 마시고 거실 서랍을 열었다⁠.

*

통장들 밑에 갈색 서류 봉투가 있다⁠. 겉에 볼펜으로 「⁠차⁠」라고만 적혀 있다⁠. 정재복이 쓴 글씨다⁠. 스물아홉 해 전에⁠.

안에서 나온 것은 자동차등록증이었다⁠. 종이가 누렇다 못해 손끝에 닿는 느낌이 천 같았다⁠. 접힌 자리는 여러 번 갈라졌다가 셀로판테이프로 붙어 있었고⁠, 이 테이프도 이제 누렇게 삭았다⁠.

제97-095812호⁠.

이 아래⁠, 인쇄된 칸 위에 손으로 적은 글씨가 있다⁠.

최초등록일⁠: 년 97 월 10 일 28⁠.

「⁠년⁠」과 「⁠월⁠」과 「⁠일⁠」이 먼저 인쇄되어 있고 이 사이사이에 누가 숫자를 채워 넣은 것이다⁠. 요즘은 저렇게 안 한다⁠. 요즘은 전부 기계가 찍는다⁠. 당시에는 등록소 직원이 볼펜을 들고 앉아서 한 사람씩 손으로 적어 줬다⁠. 이 직원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데⁠, 볼펜이 안 나와서 두 번 흔들어 잉크를 내리던 것은 기억난다⁠.

1997년 10월 28일⁠.

이날 아침에 자기가 무슨 옷을 입고 있었는지까지 생각났다⁠. 회색 잠바⁠. 지퍼가 반쯤 고장 나서 올리다 보면 중간에 걸리는 잠바였는데⁠, 이날은 새 차를 받으러 가는 날이라 이걸 입고 갔다⁠. 이게 제일 나은 옷이었다⁠.

*

여섯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전화를 걸었다⁠.

“⁠예⁠, 성원폐차장입니다⁠.⁠”

젊은 목소리였다⁠. 뒤에서 쇠 자르는 소리가 났다⁠. 이 시간에 벌써⁠.

“⁠폐차 하나 하려는데요⁠.⁠”

“⁠차종이 어떻게 되세요⁠?⁠”

“⁠포터요⁠.⁠”

“⁠연식은요⁠?⁠”

“⁠구십칠 년⁠.⁠”

수화기 저쪽이 잠깐 조용해졌다⁠.

“⁠…구십칠 년이요⁠? 아버님⁠, 그거 아직 굴러가요⁠?⁠”

“⁠굴러가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젊은 목소리가 웃었다⁠. 나쁜 웃음은 아니었다⁠. “⁠요즘 그 연식이 잘 안 들어와서요⁠. 주행거리는 얼마나 되세요⁠?⁠”

“⁠사십사만 팔천⁠.⁠”

“⁠예⁠?⁠”

“⁠사십사만 팔천 킬로⁠.⁠”

또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좀 더 길었다⁠.

“⁠…아버님⁠, 그거 진짜예요⁠?⁠”

“⁠계기판에 그렇게 나와 있어요⁠.⁠”

“⁠사고 이력은요⁠?⁠”

“⁠없어요⁠.⁠”

“⁠무사고요⁠? 사십사만에⁠?⁠”

“⁠예⁠.⁠”

“⁠허⁠.⁠”

젊은 사람이 허⁠, 하는 소리를 냈다⁠. 정재복은 이 소리가 싫지 않았다⁠. 자랑할 데가 없어서 안 했을 뿐이지⁠, 자랑거리가 아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고장은요⁠? 큰 수리 하신 거 있으세요⁠?⁠”

“⁠없어요⁠.⁠”

“⁠…엔진이나 미션이나⁠.⁠”

“⁠없어요⁠.⁠”

“⁠아버님⁠.⁠” 젊은 목소리가 이번에는 진짜로 웃었다⁠. “⁠그 차 폐차하지 마시고 박물관에 가져다 놓으세요⁠.⁠”

정재복도 조금 웃었다⁠. 웃고 나서⁠, 왜 웃었나 싶었다⁠.

날짜를 잡았다⁠. 사흘 뒤 오전 열 시⁠. 직접 몰고 오셔도 되고 견인차를 보내 드려도 된다고 했다⁠. 직접 가겠다고 했다⁠.

“⁠그럼 등록증하고 신분증 챙겨 오시고요⁠, 번호판은 저희가 떼서 반납합니다⁠. 그리고 차 안에 물건 다 빼셔야 돼요⁠. 나중에 찾으러 오셔도 이미 압축돼 있어서요⁠.⁠”

압축⁠.

정재복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이 말을 한참 들고 있었다⁠. 압축이라는 말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 그동안 한 번도 이 말을 자기 차에 붙여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

아파트 지하 주차장은 차가운 기름 냄새가 났다⁠.

B동 기둥 옆⁠, 늘 대던 자리에 이 차가 있다⁠. 감청색 포터⁠. 색은 이제 감청색이라고 부르기가 좀 미안하다⁠. 지붕은 햇빛에 삭아 하얗게 일어났고⁠, 앞 범퍼 오른쪽은 사 년 전 시장 골목에서 벽에 긁혔다⁠. 그건 사고로 안 친다⁠. 벽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짐칸 나무 바닥에는 빵 상자 자국이 그대로 있다⁠. 플라스틱 상자를 스물아홉 해 동안 밀어 넣고 빼고 했더니 상자 폭만큼 나무가 닳아서 반들반들하다⁠. 자로 잰 것처럼 줄이 나 있다⁠. 저 줄 하나하나가 다 새벽이었다⁠.

정재복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문은 늘 그렇듯 두 번째 소리에 열렸다⁠. 첫 번째는 삐걱⁠, 두 번째는 턱⁠.

앉으니 몸이 저절로 맞았다⁠. 이십구 년 동안 이 사람 하나만 앉아서 스펀지가 정재복의 모양대로 꺼져 있다⁠. 엉덩이 자리도⁠, 등 자리도⁠, 왼쪽 팔꿈치가 닿는 문짝 위쪽도⁠. 다른 사람이 앉으면 불편할 것이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 차는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한테만 편한 물건이 되어 버렸다⁠.

열쇠를 꽂았다⁠. 요즘 차는 열쇠를 안 꽂는다고 아들이 그랬다⁠. 버튼만 누르면 된다고⁠.

돌렸다⁠.

부르릉― 한 번에 걸렸다⁠. 스물아홉 해 동안 한 번에 안 걸린 날이 손에 꼽는다⁠. 이것도 영하 십오 도 아래로 내려간 날들뿐이었다⁠.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448⁠,0 그리고 뒤에 두 칸⁠.

지구 둘레가 사만 킬로미터라고 딸이 언젠가 말했었다⁠. 그러니까 이 차는 지구를 열한 바퀴 돌았다⁠. 열한 바퀴를 도는 동안 이 사람은 새벽에 나갔다가 밤에 들어왔고⁠, 이 사이에 아이 둘이 자라서 학교를 마치고 독립했다⁠.

아이들은 지구를 한 바퀴도 안 돌았는데⁠, 이 차는 열한 바퀴를 돌았다⁠.

*

사람들은 왜 보내느냐고 물으면 으레 고장이 났겠거니 한다⁠.

고장은 안 났다⁠. 스물아홉 해 동안 한 번도 안 났다⁠.

문제는 밑이었다⁠. 지난봄에 정비소에서 차를 올려놓고 사장이 손전등으로 밑을 비추더니 말없이 한참 있었다⁠. 그러고는 드라이버 손잡이로 문짝 아래쪽을 톡톡 쳤다⁠. 소리가 이상했다⁠. 사장이 이 자리를 손톱으로 긁으니까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철판이 아니라 과자 같았다⁠.

“⁠어르신⁠, 여기 이미 뚫렸어요⁠.⁠”

“⁠때우면 되잖아⁠.⁠”

“⁠때우면 옆이 뚫려요⁠. 밑이 다 이래요⁠.⁠”

“⁠부품 갈면―⁠”

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이 나이 차 부품은 이제 안 나온다고 했다⁠. 어디서 폐차 들어온 걸 뜯어다 쓰는 수밖에 없는데⁠, 이 폐차도 이제 안 들어온다고⁠.

정재복은 이 말을 알아들었다⁠. 엔진은 멀쩡하다⁠. 미션도 멀쩡하다⁠. 이 차는 아직도 시동 한 번에 걸리고 오르막을 밀어 올린다⁠. 그런데 몸이 삭았고⁠, 삭은 몸을 갈아 끼울 방법이 세상에 없어졌다⁠.

이 차가 정재복을 버린 것이 아니다⁠. 세상이 부품을 그만 만든 것이다⁠.

*

살 때 약속을 했었다⁠.

1997년 10월 28일⁠, 등록증에 손으로 적힌 이 날짜에⁠, 정재복은 새 차 앞에 서서 속으로 한 마디 했다⁠. 소리 내서 한 것도 아니고 누가 들은 것도 아니다⁠.

내가 너 안 버릴 테니까⁠, 너도 나 버리지 마라⁠. 우리 같이 가자⁠.

그리고 이 약속을 정재복은 손으로 지켰다⁠. 말로 지킬 줄을 몰라서 손으로 지켰다⁠. 정비소에서 하라는 것보다 오일을 늘 한 번씩 더 갈아 줬다⁠. 짧게 서고 짧게 가는 차가 엔진에 제일 나쁘다는 걸 알고부터는 더 그랬다⁠. 남들이 만 킬로에 간다고 하면 정재복은 오천에 갈았다⁠. 돈이 아까울 때도 이것만은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스물아홉 해 동안⁠, 이 차는 정재복을 길에 세워 둔 적이 한 번도 없다⁠.

한 번도 없다⁠.

*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들이었다⁠.

“⁠아버지⁠, 주무셨어요⁠?⁠”

“⁠어⁠.⁠”

“⁠저 잠깐만요―⁠” 저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들은 늘 전화를 걸어 놓고 다른 일을 한다⁠. “⁠제가 링크 하나 보냈는데 보셨어요⁠?⁠”

“⁠안 봤다⁠.⁠”

“⁠전기차요⁠. 보조금 나와서 생각보다 안 비싸요⁠. 아버지 이제 짐 실을 일도 없으시잖아요⁠. 승용차로―⁠”

“⁠봤다⁠.⁠”

“⁠방금 안 보셨다면서요⁠.⁠”

“⁠…어제 온 거 말하는 거면 봤다⁠.⁠”

“⁠아버지⁠, 그 차 삼십 년 됐어요⁠.⁠”

“⁠이십구 년⁠.⁠”

“⁠그게 그거죠⁠.⁠”

이게 그거가 아니다⁠. 정재복은 그렇게 말하려다 말았다⁠. 이십구 년과 삼십 년은 다르다⁠. 한 해가 다르면 이 안에 든 것이 통째로 다르다⁠. 그런데 이걸 설명하려면 스물아홉 해를 다 설명해야 해서⁠, 늘 여기서 입을 다문다⁠.

“⁠사흘 뒤에 폐차한다⁠.⁠”

“⁠…예⁠?⁠”

“⁠성원폐차장⁠. 열 시⁠.⁠”

“⁠아버지⁠, 진짜요⁠? 아니 왜 저한테 말도 안 하고―⁠”

“⁠지금 하잖아⁠.⁠”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됐다⁠. 내가 몰고 간다⁠.⁠”

“⁠아버지⁠.⁠”

“⁠내가 몰고 간다⁠.⁠”

전화를 끊고 나서⁠, 정재복은 자기 목소리가 생각보다 컸다는 걸 알았다⁠. 아들한테 화낼 일이 아니었는데⁠.

*

집에 올라와 보니 아내가 일어나 있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국을 데웠다⁠. 정재복은 사십 년째 그렇다⁠. 물어야 할 것과 안 물어야 할 것을 귀신같이 안다⁠.

정재복은 밥을 먹고⁠, 혈압약을 먹고⁠, 한참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냉장고 쪽으로 갔다⁠.

달력을 걷어 냈다⁠.

팔월 장을 뜯어서 뒤집었다⁠. 뒷면은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흰 종이였다⁠. 넓었다⁠. 이만하면 되겠다 싶었다⁠.

아내가 등 뒤에서 물었다⁠.

“⁠뭐 하시게요⁠.⁠”

“⁠아무것도 아니야⁠.⁠”

정재복은 매직펜을 찾으러 서랍을 열었다⁠. 펜은 세 자루가 있었는데 두 자루는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 한 자루를 종이 귀퉁이에 그어 보니⁠, 처음에는 안 나오다가 두 번 흔드니까 잉크가 내려왔다⁠.

스물아홉 해 전 이 등록소 직원이 그랬던 것처럼⁠.

정재복은 흰 종이를 앞에 놓고 앉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알겠는데⁠, 평생 그런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시작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한참 있다가⁠, 정재복은 맨 위에 다섯 글자를 크게 썼다⁠.

고 별 운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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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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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수작가2026.10.09· 1화

    작가 이수입니다. 스물아홉 해를 달린 트럭에게 남기는 편지입니다. 1화의 448,000이라는 숫자 뒤에 있는 시간들, 여러분에게도 오래 함께한 물건이 있다면 이야기해 주세요.

  • 조용한책상2026.09.10· 1화

    알람을 안 맞췄는데 네 시 십 분에 눈이 떠진다는 데서 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 이수작가2026.09.11

      몸이 먼저 기억하는 게 제일 오래가더라고요. 아버님께도 안부 전해 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