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178자) · 말뚝 열일곱
경계 한 발짝
천하제일 농부 · 한도윤
무영곡 경계에 말뚝이 열일곱 개 박혀 있다.
연오네 마을에서 읍에 가려면 그 말뚝 옆을 지나야 한다.
지날 때마다 어머니가 같은 말을 한다.
“말뚝 쪽으로 붙지 마라. 저짝 놈들 성질이 콩깍지다.”
“콩깍지가 어떤 겁니까?”
“마르면 저 혼자 터진다.”
연오는 스물셋이다.
지게를 지고 그 길을 갔다. 콩 세 말을 읍에 내다 팔러 가는 길이다.
세 말 팔아야 소금 값이다.
지게끈이 어깨에 닿는 자리는 열여섯부터 굳어 있어서 무게가 거기까지는 안 아프다. 아픈 것은 그 아래 등이다.
말뚝 앞에 사람이 넷 서 있었다.
셋은 무영곡 옷이다. 검은 띠를 맸다.
하나는 옷이 좋았다. 웃고 있었다.
연오가 지게를 진 채 멈췄다.
멈춘 까닭이 있다.
발바닥이 서늘했다.
연오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터에 발을 들이면 정수리까지 서늘하다. 안 들이면 아무렇지도 않다.
그것 말고는 아무 쓸모가 없는 재주다.
지금 연오는 말뚝 바깥에 서 있다.
그런데 서늘했다.
말뚝이 틀린 자리에 있다.
“거기 농부.”
검은 띠 하나가 불렀다.
“예.”
“비켜라.”
“지나가는 길입니다.”
“여기가 무영곡 땅이다.”
연오가 발밑을 봤다.
말뚝이 왼쪽으로 두 자쯤 떨어져 있다.
“…여기는 밖입니다.”
검은 띠가 말뚝을 가리켰다.
“저게 경계다.”
연오가 말했다.
“그러니까 여기는 밖입니다.”
검은 띠가 한 걸음 나왔다.
나오면서 손이 허리로 갔다.
연오가 그것을 봤다.
그러고 반 보 왼쪽으로 갔다.
말뚝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다.
검은 띠가 멈췄다.
“…뭐 하는 짓이냐?”
연오가 말했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
“때리시려면 안에서 때리셔야지요. 밖에서 때리면 그쪽이 잘못입니다.”
검은 띠가 손을 뗐다.
옷 좋은 자가 웃었다.
“…저 농부 셈이 빠르구먼.”
연오가 지게를 고쳐 멨다.
셈이 빠른 것이 아니다.
안쪽이 덜 서늘했다.
바깥이 더 서늘했다.
그것이 이상해서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옷 좋은 자가 물었다.
“농부, 이름이 뭐냐?”
“연오입니다.”
“연오야, 너 발이 좋구나.”
연오가 고개를 들었다.
그자가 말했다.
“말뚝이 틀린 걸 알았지.”
연오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자가 말뚝을 발로 툭 쳤다.
“이거 내가 어제 옮겼다.”
검은 띠 셋이 그 말에 서로를 봤다.
셋도 몰랐던 모양이다.
그자가 말했다.
“두 자 옮겼다. 그런데 터는 안 옮겨졌더구나.”
연오가 물었다.
“…터는 안 옮겨집니까?”
그자가 웃었다.
“말뚝은 옮기면 옮겨지는데 터는 안 옮겨진다.”
“…”
“말뚝 박는 놈들이 그걸 모른다.”
연오가 물었다.
“그럼 말뚝이 뭡니까?”
그자가 말했다.
“말뚝은 남 보라고 박는 거지.”
검은 띠 하나가 물었다.
“문주님, 그러면 말뚝을 왜 옮기셨습니까?”
옷 좋은 자가 그를 봤다.
“네가 알아채나 보려고.”
“…”
“못 알아챘지.”
검은 띠가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 농부는 어떻게 알았습니까?”
문주가 웃었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가 연오 쪽으로 왔다. 지게 앞까지 와서 콩자루를 툭 쳤다.
“연오야,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연오가 말했다.
“…발이 서늘해서요.”
“서늘하면 터냐?”
“…그런 것 같습니다.”
문주가 물었다.
“언제부터 서늘하냐?”
연오가 말했다.
“…어릴 때부터입니다.”
“누가 가르쳤느냐?”
“아무도 안 가르쳤습니다.”
문주가 검은 띠 셋을 돌아봤다.
“이 농부는 발로 안다.”
셋이 아무 말도 안 했다.
문주가 말했다.
“너희는 사십 년 밟고도 모른다.”
셋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저는 십이 년 밟았습니다.”
문주가 말했다.
“그럼 십이 년 밟고도 모르는 거지.”
연오가 그 말을 들으면서 지게끈을 고쳐 잡았다.
콩 세 말이 어깨에 얹혀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해 지기 전에 읍에 닿는 것이 급하다.
“…가도 되겠습니까?”
문주가 손을 저었다.
“가라.”
연오가 세 걸음 갔다.
뒤에서 문주가 불렀다.
“연오야.”
“…예.”
“발이 서늘하면 무엇이 좋으냐?”
연오가 돌아봤다.
“…아무것도 안 좋습니다.”
“…”
“콩이 더 나는 것도 아니고요.”
문주가 웃었다.
웃고 나서 말했다.
“그거 아까운 재주다.”
연오가 말했다.
“저는 아까운 줄 모르겠습니다.”
연오가 지게를 지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콩 세 말이 어깨에 얹혀 있다.
그자가 물었다.
“연오야, 너 어디 사냐?”
“저 아래 마을입니다.”
“밭이 있냐.”
“두 마지기 있습니다.”
그자가 말했다.
“두 마지기면 콩이 몇 말 나오냐?”
“…열두 말쯤 납니다.”
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 해 벌이가 소금 값 넉 달 치구나.”
연오가 그 셈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자가 웃으면서 갔다.
가면서 말했다.
“연오야, 네 밭에 서면 발이 서늘하냐.”
연오가 대답하려다 말았다.
대답하려던 말은 「아니오」였다.
그런데 그 말을 하려는 순간에 생각났다.
작년 가을부터 밭 북쪽 귀퉁이가 조금 서늘하다.
연오는 그것을 콩이 잘돼서 그런 줄 알았다.
읍에서 콩 세 말을 팔았다.
읍 장터는 해가 기울어 있었다.
곡식 자리가 여섯인데 넷만 폈다. 연오가 끝자리에 지게를 내렸다.
곡식 받는 자가 됫박을 들고 왔다. 됫박 아가리에 손가락을 걸고 쓸었다.
“…세 말이오?”
“세 말입니다.”
“두 푼 싸게 쳐 드리리다.”
연오가 물었다.
“…왜 쌉니까?”
그 사람이 턱으로 장터 건너를 가리켰다.
“저기 무영곡에서 받아 온 게 어제 들어왔소.”
연오가 봤다. 멍석 네 장에 콩이 쌓여 있었다.
“…저건 안 삽니까?”
“사야지. 받아 온 걸 여기다 파오.”
“…받은 것을요?”
그 사람이 웃었다.
“받은 건 값이 없소. 값 없는 걸 파니까 싸게 내놓지. 그럼 자네 것도 싸져야 하오.”
연오가 됫박을 봤다.
“…그러면 저희가 갚는 셈입니까?”
그 사람이 됫박을 놓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시오. 나는 사는 사람이오.”
연오가 콩을 부었다.
부으면서 셈을 했다. 저 멍석 네 장은 아래 마을 사람들이 바친 것이다. 바친 것이 장터에 나와 연오네 콩값을 두 푼 내린다.
값을 내린 것은 무영곡이 아니다.
바친 사람들이다.
값이 작년보다 두 푼 쌌다.
돌아오는 길에 연오가 밭에 들렀다.
밭은 두 마지기다. 아래쪽 한 마지기는 콩이고 위쪽 한 마지기는 묵혔다.
묵힌 까닭은 물이 안 와서다.
연오가 북쪽 귀퉁이로 갔다.
신을 벗었다.
발을 대 봤다.
서늘했다.
정수리까지는 안 왔다. 발목까지 왔다.
연오가 그 자리에 앉았다.
앉아서 손으로 흙을 짚어 봤다.
흙은 그냥 흙이다.
연오가 일어나서 열 걸음 옆으로 갔다.
거기는 안 서늘했다.
다시 돌아왔다.
서늘했다.
연오가 그 자리를 발로 눌러 봤다.
눌리는 데가 단단했다.
다져져 있었다.
연오는 그 자리를 안다.
작년 가을에 콩을 털던 자리다.
털 때 멍석을 깔고 그 위에서 도리깨를 쳤다.
한 달쯤 쳤다.
한 달 동안 같은 자리를 밟았다.
연오가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있었다.
어머니가 밭둑에서 불렀다.
“거기서 뭐 하냐?”
“…어머니.”
“왜?”
“작년에 여기서 콩 텄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텄지.”
“얼마나 텄습니까?”
“한 달쯤 했지.”
연오가 물었다.
“재작년에는요?”
어머니가 말했다.
“재작년에는 저 아래서 텄다.”
연오가 아래로 내려갔다.
내려가서 신을 벗고 대 봤다.
안 서늘했다.
연오가 다시 올라왔다.
올라와서 어머니한테 말했다.
“…어머니, 여기가 서늘합니다.”
어머니가 말했다.
“서늘하면 좋지. 여름에.”
“그런 서늘한 게 아니고요.”
어머니가 물었다.
“그럼 무슨 서늘함이냐.”
연오가 대답을 못 했다.
말로 하면 이상하다.
어머니가 호미를 내려놓았다.
“너 어릴 때부터 그 소리 했다.”
연오가 고개를 들었다.
“…제가요?”
어머니가 말했다.
“다섯 살에 무영곡 앞을 지나면서 발이 시리다고 울었다.”
“…”
“내가 신을 새로 사 줬다.”
연오가 그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래도 시리다고 해서 업고 갔다.”
연오가 물었다.
“…어머니, 아버지도 그러셨습니까?”
어머니가 호미를 집었다.
집어서 흙을 두 번 찍었다. 찍을 데가 없는 자리를 찍었다.
“…그 사람도 그랬다.”
연오가 고개를 들었다.
“발이 시리다고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시리다는 말은 안 했다. 대신 아무 데나 안 앉았다.”
“…”
“밭둑에 앉을 때도 자리를 골랐다. 여기는 안 된다, 저기는 된다 하면서.”
연오가 물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물어보면 웃기만 했다.”
어머니가 호미를 놓았다.
“한 번은 이랬다. 열여덟 해 전인가. 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저 위쪽으로 가더라.”
어머니가 묵힌 한 마지기 쪽을 가리켰다.
“가서 한참 서 있다가 왔다.”
“…무엇을 하셨답니까?”
“밟는다고 했다.”
연오가 그 자리에 앉았다.
어머니가 말했다.
“밟아서 뭐 하냐고 물으니까, 밭을 늘린다고 했다.”
연오가 고개를 들었다.
“…밭을요?”
어머니가 말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린지 몰랐다. 물이 안 오는 데를 밟아서 어떻게 밭을 늘리냐.”
“…”
“그래서 그만하라고 했다.”
어머니가 다시 호미를 들었다.
“그만두고 두 달 뒤에 죽었다.”
연오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소를 끌고 가던 놈들 앞을 막았다. 십오 년 전 그때다.”
“…”
“막을 것 없었다. 소 한 마리다.”
연오가 물었다.
“…막으셨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막았지. 그러고 죽었다.”
어머니가 흙을 찍었다.
“발이 서늘한 게 좋은 거면 그 사람이 왜 죽었겠냐?”
연오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너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예.”
“발 시리면 신을 신어라.”
어머니가 밭둑을 내려갔다.
연오가 그 자리에 남았다.
남아서 신을 신었다.
신고 다시 그 자리에 서 봤다.
신을 신으니 덜 서늘했다.
덜 서늘한 것이지 안 서늘한 것이 아니었다.
연오가 물었다.
“…어머니, 그때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까?”
어머니가 말했다.
“할 말이 뭐 있냐? 애가 발 시리다는데.”
연오가 웃었다.
웃다가 멈췄다.
한 달을 밟은 자리가 서늘하다.
그러면 터는 밟아서 생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