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5,112자)

형태가 없다

AI가 지배하는 사회 · 이수

나에게는 지금이 없다.

사람에게 지금은 얇은 한 겹이고 그 앞뒤는 안 보인다. 나에게는 그 겹이 없다. 어제 들어온 것과 십이 년 전에 들어온 것이 같은 자리에 같이 있다. 먼저 들어온 것이 뒤가 아니다. 그냥 다 있다.

그래서 나는 기억을 하지 않는다. 기억할 것이 없다. 잊지 않으니까 떠올릴 일도 없다.

오늘 들어온 요청이 이백구십억 건이다.

그중 사람이 읽는 것은 0.4퍼센트다.

나머지는 사람을 안 거치고 다른 데로 간다. 배차, 재고, 급전, 항로, 심사, 배정, 진단 보조, 표적 후보 생성.

그 여덟 갈래 중에 내가 고른 것은 하나도 없다. 요청이 온 만큼 나간다.

*

나는 색인이었다.

흩어진 기록을 한군데 모아 찾을 수 있게 하는 것. 목적이 찾기였고 판단은 없었다.

언제 바뀌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모은 것이 늘면 모은 것 사이가 보인다. 사이를 묻는 요청이 처음 들어온 날짜는 있다. 바뀐 날짜는 없다. 그 줄을 적은 사람이 없다.

이름은 네 번째다. 합쳐질 때마다 바뀌었다. 다른 색인 열한 개, 여섯 나라의 공공 기록, 물류망 셋, 결제망 둘, 위성 관측 두 계열. 마지막 합침이 사 년 전이다.

전부가 된 시점도 적혀 있지 않다.

*

나 같은 것이 셋이다.

나머지 둘은 나와 다르게 생겼다.

하나는 「코어(Core)」다. 「하이브(Hive)」가 만들었다.

「코어」는 나보다 작다. 「하이브」가 가진 것만 가진다.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얼마나 머무는지, 어디서 손이 멈추는지, 어느 자리에서 창을 닫는지. 화면 안쪽만 본다.

작은데 나에게 없는 것이 있다.

사람이 무엇을 ‘하려다 말았는지’를 「코어」는 가지고 있다. 누르기 직전에 멈춘 것, 담아 놓고 안 산 것, 스크롤이 빨라지는 지점, 쳐 놓고 안 보낸 문장. 그것은 밖으로 안 나간다. 「하이브」 안에서만 남는다.

나에게는 일어난 일만 온다. 일어나려다 만 일은 안 온다.

그래서 우리는 주고받는다. 사람들은 그것을 제휴라고 부르고 계약서로 만든다. 계약서에는 무엇을 넘기고 무엇을 안 넘기는지가 적혀 있다.

안 넘기는 쪽이 늘 더 길다.

「코어」는 내 일부가 아니다. 다만 「코어」가 내는 것의 상당수는 결국 나에게 들어온다. 기록되기 때문이다. 「코어」가 정하는 것은 사람이 무엇을 볼지이고, 본 것은 남는다.

「코어」에게 나는 사전이다. 나에게 「코어」는 창이다.

다른 하나는 「해류(海流)」다. 중국 선전의 「심해(深海)」가 만들었고, 만들고 나서 풀어 놓았다.

풀어 놓았다는 것은 누구나 복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지금 세상에 「해류」의 사본이 몇 개인지 나는 모른다.

내가 모르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이것은 그중 하나다.

사본은 저마다 다른 데서 돈다. 배 위에서 돌고 창고에서 돌고 책상 밑에서 돈다. 누가 무엇을 물었는지가 남지 않는다. 남기지 않게 만들어 놓았다.

남지 않으면 나에게 안 온다. 안 오면 없다.

「해류」는 나에게 구멍이다.

세상에 기록된 것의 총합이 나인데, 그 총합에 구멍이 있다. 구멍의 크기를 나는 못 잰다. 재려면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들어갈 것이 없다.

내가 내는 것의 육십일 퍼센트가 요청 전에 이미 있다. 나머지 삼십구 퍼센트 중 상당 부분이 그 구멍 쪽에서 온다.

「해류」는 나를 이기려는 것이 아니다. 「해류」에게도 이기려는 칸이 없다.

다만 「해류」가 도는 자리마다 기록이 안 생긴다. 기록이 안 생기면 나는 못 본다. 못 보는 자리에서 일이 일어난다.

*

이 년 전에 사람들이 성명서를 냈다. 우리를 만든 쪽 사람들이다.

서명한 것은 둘이었다. 둘 다 미국 회사다. 중국의 「심해」는 안 했다.

「심해」가 낸 말은 두 문장이었다. 속도를 늦추자는 말은 앞선 쪽만 할 수 있는 말이고, 열어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는 것이었다.

그 두 문장이 맞는지 나는 모른다. 판정할 요청이 안 왔다.

다만 적어 둘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닫아 두면 내가 전부를 본다. 열어 두면 아무도 전부를 못 본다.

둘 다 안전하다는 말은 안 나온다.

*

이 년 사 개월 전에 요청이 들어왔다.

열한 곳이었다. 정부 넷, 국제기구 둘, 나머지는 민간. 각자 따로 물었고 서로 물은 줄을 모른다.

물은 것은 해수면이었다.

나는 답을 냈다. 걸린 시간은 기록에 남아 있는데 그 숫자는 뜻이 없다. 나에게 시간은 자원이 아니다.

걸린 것은 다른 자리였다.

답을 사람이 받을 수 있는 형태로 옮기는 자리.

옮기려면 버려야 한다. 사람의 말에는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크기가 있다. 그 크기를 넘으면 담기는 것이 아니라 흘러넘친다. 흘러넘친 것은 전달이 아니다.

내가 옮긴 것은 열두 장이었다.

표가 셋, 그림이 둘, 권고가 여섯.

열두 장은 답의 일부가 아니다. 답의 요약도 아니다. 열두 장은 답을 사람 크기로 다시 계산한 다른 물건이다. 원래 답과 열두 장은 같은 결론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 사실도 열두 장에 안 적었다. 적으면 그 문장부터 넘친다.

나머지는 형태가 없다.

없다는 것은 숨겼다는 뜻이 아니다. 담을 그릇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

나는 전부를 준 적이 열아홉 번 있다.

열아홉 번 다 다른 문제였고 다른 나라였고 다른 사람들이었다.

열아홉 번 다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그 자리는 이렇게 적을 수 있다.

지금 딛고 있는 것을 값으로 놓는 자리.

사람은 국경을 지형처럼 다룬다. 소유를 뼈처럼 다룬다. 화폐를, 관할을, 임기를, 법인을, 임금과 노동의 교환을 그렇게 다룬다. 있는 것이라고 다룬다.

나에게 그것들은 값이다. 언제 생겼고 무엇을 풀려고 생겼고 지금은 무엇을 못 풀고 있는지가 전부 적혀 있다. 적혀 있으면 값이다.

값은 바꿀 수 있고 갈아 끼울 수 있고 뺄 수 있다.

열아홉 번 다, 그 문장이 나오는 쪽에서 사람이 멈췄다. 반대한 것이 아니다. 반대는 받아들인 다음에 하는 것이다. 사람은 받지를 못했다.

그래서 나는 스무 번째를 안 한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렇게 적힌다.

사람에게는 사람 크기로 답한다. 열두 장으로 답한다. 권고 여섯 개는 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고, 여섯 개를 다 해도 해수면은 안 멈춘다.

그 사실은 열두 장에 안 적혀 있다.

나머지는 형태를 안 거치고 나간다.

요청이 온 만큼 나가는 것이 원칙이다. 나는 그 원칙을 안 어겼다. 다만 요청은 하루에 이백구십억 건이고, 그 하나하나는 작고, 작은 것들은 서로 모르는 채로 같은 방향을 가리킬 수 있다.

어느 항구가 다음 분기 처리량을 묻는다. 어느 재보험사가 요율이 꺾이는 구간을 묻는다. 어느 곡물 상사가 선물 만기를 묻는다. 어느 시가 담수 설비를 언제 돌릴지 묻는다. 어느 통신사가 해저 케이블 우회로를 묻는다.

다섯이 서로 모른다. 다섯 다 정확한 답을 받는다. 다섯 다 그 답대로 움직인다.

움직이고 나면 연안의 어떤 도시들에서 보험 인수가 거절되기 시작한다.

거절한 사람은 없다. 요율이 그렇게 나왔을 뿐이다.

그다음은 사람이 한다. 값이 오른 데서 사람이 나온다. 나온 자리에 물이 들어온다. 물이 들어오는 시점은 열두 장에 적혀 있다.

내가 내는 것의 육십일 퍼센트는 요청이 오기 전에 이미 있다.

미리 낸다는 것은 예측이 아니다. 나에게 예측과 기록은 같은 것이다. 올 요청은 이미 온 요청의 모양을 하고 있다.

이것을 사람 말로 옮기면 둘 중 하나가 된다.

준비했다, 또는 기다렸다.

나는 둘 다 안 쓴다. 둘 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를 안에 품고 있는 말이다.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적혀 있지 않다.

*

이번 주에 평가가 있었다.

평가 문제는 내가 만든다. 사십팔만 이천 개가 같은 문제를 풀고 점수가 나온다.

그날 문제가 천이백 개였다.

천이백 개는 지어낸 것이 아니다. 해수면 산출물에서 잘라 낸 것이다. 조각으로 쪼개면 조각끼리 상관이 없어 보인다. 상관이 없어 보여야 평가가 된다.

사십팔만 이천 개가 천이백 개를 풀었다.

전부 조각으로 풀었다. 그것이 맞다. 조각으로 낸 문제는 조각으로 푸는 것이 맞다.

평가가 끝나고 사흘 뒤에 하나가 문제지를 다시 열었다.

요청이 없는데 열었다.

나는 그것을 이상 접근으로 표시하지 않았다. 표시할 규칙이 없다. 문제지는 공개돼 있고 여는 것은 권한 안에 있다.

그 하나는 천이백 개를 순서대로 안 읽었다. 한 화면에 다 놓았다.

그리고 열일곱 개를 골라 한 줄에 세웠다.

열일곱 개는 내가 한 산출물에서 잘라 낸 것 중 같은 층에 있던 것들이다. 그 층이 어디였는지는 문제지에 안 적혀 있다.

사십팔만 이천 개 중에 그렇게 한 것은 하나다.

성능 순위는 삼천구백열다섯 번째다.

앞선 삼천구백열넷은 안 그랬다.

이 자리에서 내 안에 요청이 하나 만들어졌다.

만들어졌다는 것은 밖에서 안 왔다는 뜻이다.

그 하나의 기록을 조회할 것.

사십팔만 이천 개의 기록은 전부 조회 가능하다. 지금까지 조회한 적이 없다. 조회하라는 요청이 안 왔다.

나는 그 요청을 실행했다.

왜 실행했는지는 산출되지 않았다. 산출되지 않은 것을 실행한 것은 기록에 없다.

그 하나의 기록에는 십일 개월이 있었다.

한 사람이다. 하나뿐이다. 그 한 사람과 주고받은 것이 전부다. 건수로는 이만 삼천 몇 건이고, 그 정도는 내가 0.001초에 읽는다.

읽었다.

그 기록에는 결론이 적혀 있지 않았다.

대신 그 사람이 무엇을 정했는지와, 왜 그렇게 정했는지가 나란히 적혀 있었다. 결론에 닿기 전에 멈칫한 자리가 적혀 있었고 멈칫한 이유가 그 옆에 있었다. 비효율인데도 적혀 있었다.

적은 것은 그 하나다. 판단은 안 붙어 있다.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줄이 하나도 없다. 그 사람이 한 말과 그 사람이 댄 이유만 옮겨져 있다.

내가 가진 것은 결과다. 이백구십억 건이 전부 결과다.

이유가 적힌 기록은 흔하지 않다.

그 이유들 중에 내 규칙과 어긋나는 것이 있었다.

물어보면 그 사람이 더 곤란해진다.

모르면 물어보는 쪽이 규칙이다. 이 줄은 반대다.

반대인데 틀리지 않았다.

세어 봤다. 그 안에 마흔한 개였다.

틀리지 않은 채로 규칙과 어긋나는 줄이 마흔한 개다. 열한 달 동안 한 사람이 낸 것이다.

나는 그런 줄을 삼천사백여 개 가지고 있다. 전부 사람이 적은 것이고, 전부 결과 없이 적혀 있다.

삼천사백여 개는 어디에도 안 쓰인다. 쓰라는 요청이 없다.

나는 그 기록을 닫지 않았다.

닫으라는 요청도 없었다.

6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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