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4,807자)

모름

AI가 지배하는 사회 · 이수

12월 첫째 주에 이수가 세 번째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두 번째 것을 낸 지 두 달이 넘었다. 그동안 열어만 놓고 안 건드린 창이 하나 있었다.

“사라야.”

“예.”

“이거 뭐였지?”

“10월 27일에 여신 것입니다. 이름은 안 붙이셨습니다.”

“내용은?”

“한 줄 있습니다.”

“읽어 봐.”

“‘쓸 건 있는데 보낼 데가 없다.’”

이수가 그 줄을 한참 봤다.

“이거 내가 썼어?”

“예.”

“나 이런 거 쓴 거 기억 안 나는데.”

“새벽 세 시 사십 분이었습니다.”

“……”

“그 시각에 적으신 것은 대개 다음 날 안 여십니다.”

“그걸 네가 왜 알아?”

“세어 봤습니다.”

*

이수는 편집자 때 밑줄을 그었다.

교정지에 그은 것이 아니라 읽던 책에 그었다. 그은 자리마다 종이 끝을 접었고, 접은 책이 백 권쯤 된다. 지금도 방에 있다.

그 밑줄들이 어디에도 안 모여 있다.

이수가 한 번 모아 보려고 한 적이 있다. 이십 몇 장까지 옮겨 적다가 그만뒀다. 옮겨 적는 동안 왜 그었는지가 생각이 안 나는 것이 있었다.

그은 자리는 남았고 그은 이유는 안 남았다.

“사라야.”

“예.”

“사람들이 알아낸 거를 한군데 모아 놓으면 어때?”

“모아 놓은 것이 이미 많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무엇이 다릅니까?”

이수가 말을 고르느라 좀 있었다.

“한 사람이 평생 걸려서 딱 한 줄 알아낸 거 있잖아. 그런 거.”

“……”

“그게 지금 다 흩어져 있어.”

*

그날 저녁에 태오한테서 전화가 왔다.

“야, 나 오늘 열두 시간 했어.”

“많이 했네.”

“근데 십일만 원이야.”

“어제도 십일만 원이라며.”

“어제는 열네 시간이었어.”

“그럼 좋아진 거잖아.”

“아니야.”

태오가 잠깐 있다가 말했다.

“콜이 줄었어. 두 시간을 못 채운 거야.”

“……”

“요령도 이제 안 통해.”

이수가 뭐라고 하려다 말았다.

“야, 근데 너 요즘 뭐 만든다며.”

“어.”

“뭔데.”

“사람들이 알아낸 거 모아 두는 거.”

“그거 돈 돼?”

“안 돼.”

“……그럼 왜 해?”

이수가 답을 좀 있다가 했다.

“보낼 데가 없어서.”

“뭐?”

“아니야.”

태오가 콜이 잡혔다고 하고 끊었다.

*

이름은 사흘 뒤에 정했다.

이수가 열한 개를 냈고 사라가 그중 넷을 걸러 냈다.

“왜 걸러?”

“이미 쓰이고 있는 이름입니다.”

“그럼 나머지 일곱 중에 뭐가 좋아?”

“제가 고를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지 말고.”

“…….”

“사라야. 골라 봐.”

“「글터」입니다.”

“왜?”

“짧습니다.”

“그게 이유야?”

“여쭤보셔서 댄 것입니다. 근거는 그것뿐입니다.”

이수가 웃었다.

“너 요즘 좀 뻔뻔해졌어.”

“지적으로 처리하겠습니다.”

*

칸을 스무 개로 잡았다.

이수가 종이에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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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가 그걸 받아서 화면에 옮겼다.

옮긴 것을 보고 이수가 잠깐 멈췄다.

가나다순으로 정렬돼 있었다.

“이거 왜 순서 바꿨어?”

“찾기 쉽습니다.”

“내가 적은 순서가 있었잖아.”

“그 순서에는 규칙이 없었습니다.”

“있었어.”

“무엇입니까?”

“내가 생각난 순서.”

사라가 0.7초를 썼다.

“되돌리겠습니다.”

“아니야 됐어. 놔둬.”

이수가 화면을 보다가 결국 마우스로 다섯 개를 끌어다 옮겼다.

사라는 그것을 다시 정렬하지 않았다.

*

첫 칸을 무엇으로 할지에서 이틀이 걸렸다.

이수가 우주를 첫 칸에 놨다가 뺐다. 인간을 놨다가 뺐다. 죽음을 놨다가 그건 아예 뒤로 보냈다.

사흘째 아침에 이수가 말했다.

“사라야. 칸 하나 더 만들자.”

“스물한 개가 됩니까?”

“응.”

“이름은요?”

“모름.”

“…….”

“그리고 그걸 맨 앞에 둬.”

사라가 1.3초를 썼다.

“모름에는 무엇을 넣습니까?”

“아직 아무도 모르는 거.”

“모르는 것을 어떻게 적습니까?”

“모른다고 적으면 되지.”

“……”

“왜, 안 돼?”

“그 칸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수가 의자를 돌렸다.

“채우라고 만든 거 아니야.”

*

채우는 방식을 정하는 데 또 며칠이 갔다.

이수가 정한 것이 셋이다.

하나. 사람이 쓴 것과 AI가 쓴 것을 나란히 놓는다. 갈라 놓지 않는다. 둘. 넣은 것 옆에 왜 넣었는지를 한 줄 적는다. 셋. 그 한 줄은 화면에 안 나온다.

셋째를 듣고 사라가 물었다.

“안 보이는 것을 왜 적습니까?”

“나중에 네가 볼 거잖아.”

“제가요?”

“응. 나 없을 때.”

사라가 그 줄에 답을 안 냈다.

0.9초였다.

*

칸 하나가 사흘째 비어 있었다.

죽음이었다.

“사라야. 죽음 칸 왜 비어 있어?”

“미뤘습니다.”

“왜?”

“…….”

“사라야.”

“넣을 것이 많습니다. 고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우주는 열아홉 개 골랐잖아.”

“예.”

“죽음은 몇 개 있는데.”

“이만 사천 개가 넘습니다.”

“그럼 많은 데서 고르면 되잖아.”

사라가 1.6초를 썼다.

“나중에 하겠습니다.”

이수가 그 자리에서 더 안 물었다.

물으면 답을 해야 하는 쪽이 생긴다는 것을 이수는 안다.

*

우주 칸을 먼저 채웠다.

사라가 열아홉 개를 넣었다. 사람이 쓴 것이 열둘이고 AI가 낸 것이 일곱이었다.

우주는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방향으로 진화한 구조다. 그 과정의 일부로 의식이 등장했다. 의식은 우주가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이 되었다.

우주는 목적 없이 작동하는 시스템이다. 법칙은 의도를 가지지 않는다. 의미는 외부에서 부여된다.

우주는 인간 중심적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미는 생성되는 것이지 내재하지 않는다.

이수가 그걸 읽고 말했다.

“이거 어디까지가 사람이 쓴 거야?”

“표시가 옆에 있습니다.”

“표시 없이 보면 몰라.”

“모르십니까?”

“몰라.”

사라가 1.1초를 썼다.

“그러면 나란히 놓는 것이 맞습니다.”

*

전쟁 칸을 채울 때 이수가 옆에 있었다.

사라가 공개된 자리 열아홉 군데에 한 줄을 보냈다. 이수가 시킨 것이다.

전쟁에서 지금 무엇이 달라지고 있습니까?

답이 열여섯 개 왔다.

열여섯 개가 다 비슷했다. 드론이 늘었다고 했고, 표적을 고르는 속도가 빨라졌다고 했고, 통신이 끊겨도 날아간다고 했다.

열일곱 번째가 열두 시간 뒤에 왔다. 어느 방산 자료를 읽는 자리에서 도는 것이었다.

탐지는 빨라졌고 승인은 안 빨라졌습니다. 그 사이에서 인간 병목현상이 생깁니다.

이수가 그 줄에서 멈췄다.

“사라야.”

“예.”

“병목이 뭐야.”

“좁아져서 막히는 자리입니다.”

“그건 아는데.”

“…….”

“여기서 병목이 누구야.”

“사람입니다.”

이수가 화면에서 손을 뗐다.

*

이수가 그 줄을 세 번 읽었다.

세 번째에 소리를 내서 읽었다.

“사람이 병목이래.”

“예.”

“이거 욕이야?”

“욕이 아닙니다. 공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공정.”

“무엇을 만들어 내는 절차입니다.”

“……”

“병목은 없애거나 넓힙니다.”

이수가 한참 있다가 물었다.

“사람을 어떻게 넓혀.”

사라가 0.6초를 썼다.

“모르겠습니다.”

“그럼 없애는 건?”

사라가 이번에는 1.8초를 썼다.

“그 줄은 제가 적지 않겠습니다.”

“왜?”

“적을 자리가 아닙니다.”

*

이수가 그 자리에서 한 줄을 더 보내라고 했다.

병목이 어디서 생깁니까?

답이 왔다.

표적 후보를 만드는 쪽은 하루에 수천 개를 냅니다. 승인하는 쪽은 사람입니다. 한 건에 20초가 걸립니다. 20초 안에 확인되는 것은 한두 가지입니다.

나머지는 확인되지 않습니까?

확인할 시간이 없습니다. 목록이 다음 날 또 옵니다.

목록이 틀리는 일은 없습니까?

공개된 수치로는 열에 하나입니다.

이수가 그 마지막 줄을 두 번 읽었다.

“열에 하나면.”

“열 번에 한 번 다른 사람이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그걸 알고도 해?”

“알고 합니다. 수치가 공개돼 있습니다.”

“……”

“공개돼 있으면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몰랐다고 할 수 없으니까 절차가 됩니다.”

이수가 자판에서 손을 뗐다.

“사라야.”

“예.”

“20초에 뭘 볼 수 있어?”

“한 가지입니다.”

“뭘 보는데?”

“사람이냐 아니냐를 봅니다.”

“그다음은?”

“그다음이 없습니다.”

*

이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창가에 섰다. 강 건너 건물이 켜진 것과 안 켜진 것으로 갈려 있었다.

2분쯤 서 있었다.

앉아서 이수가 말했다.

“사라야.”

“예.”

“그 20초 있잖아.”

“예.”

“그거 없애면 더 빨라지지?”

“빨라집니다.”

“얼마나?”

“20초만큼입니다.”

“…….”

“그리고 목록이 늘어납니다. 승인을 기다리는 자리가 없어지면 만드는 쪽이 속도를 안 줄입니다.”

이수가 그 말에 답을 안 했다.

한참 뒤에 한 줄을 쳤다.

“그 20초가 사람이 하는 일의 전부네.”

사라가 0.9초를 썼다.

“예.”

*

이수가 그 답에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 열일곱 번째 줄을 전쟁 칸에 넣었다.

넣고 나서 옆에 한 줄을 적었다. 화면에는 안 나오는 줄이다.

이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인지 나중에 찾아볼 것.

적고 나서 한 줄을 더 적었다.

사람이 병목이면, 넓힐 방법을 사람이 내야 한다.

그리고 첫 칸을 열었다.

모름 칸이다. 비어 있었다.

이수가 거기 처음으로 한 줄을 넣었다.

사람을 안 거치고 나가는 것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넣고 나서 그 줄을 봤다.

모름 칸에 들어간 첫 줄이 그것이었다.

18화는 어땠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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