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5,591자)
쓸모
2027년, AI 지배의 시작 · 이수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작은 마을 마리엔탈, 그리고 할 일이 사라진 낮 시간.
AI가 물질의 결핍을 모두 풀어도 사람의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때부터 더 어려운 물음이 시작된다.1
사람은 오랫동안 살아남으려고 일했다. 사람은 먹고살려고 배우고, 겨루고, 관계를 맺었다. 그렇게 공동체 안에서 자기 자리를 찾았다. 결핍이 끝난 사회에서는 이 구조가 사라진다. AI가 물건을 만들고, 고장을 고치고, 상담을 하고, 작품을 짓고, 사람에게 맞는 선택지를 골라 준다. 겉으로 보면 이 사회는 낙원이다.1
일이 사라진 마을을 실제로 들여다본 연구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심리학자 마리 야호다와 파울 라자스펠트, 한스 차이젤은 1931년 11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빈 근교의 마을 마리엔탈을 조사했다. 마리엔탈에서는 섬유 공장이 문을 닫아 주민 거의 모두가 일자리를 잃었다.2
세 사람이 1933년에 낸 보고서는 마을의 변화를 이렇게 적었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이 줄었고, 모임이 시들었으며, 주민끼리의 적대가 늘었다. 주민들은 시간을 쓸 물질의 수단과 마음의 수단을 함께 잃었다.2
야호다는 1981년 논문에서 일자리가 임금 말고도 사람에게 주는 것 다섯 가지를 꼽았다. 이 다섯은 하루의 시간 구조, 사람과의 만남, 함께하는 목적, 지위와 정체성, 규칙적인 활동이다.3 마리엔탈 사람들은 돈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은 2015년 11월에 한 연구를 발표했다. 1999년부터 2013년 사이 미국의 45~54세 백인 사망률이 오히려 올랐다는 연구였다. 다른 부유한 나라에서는 없던 일이었다. 늘어난 죽음의 원인은 약물과 술 중독, 자살, 만성 간 질환이었다. 이 죽음은 고졸 이하에서 가장 많았고, 뒷날 「절망사」라는 이름을 얻었다.4
사람이 행복을 느끼는 바탕은 소비만이 아니다. 사람에게는 해낼 수 있다는 느낌,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 내 길을 내가 정한다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5
심리학은 이 세 가지 느낌을 오래 다뤄 왔다. 미국 로체스터대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와 리처드 라이언은 「자기결정이론」을 세웠다. 두 사람은 이 이론에서 사람에게 보편적이고 타고난 기본 욕구가 셋 있다고 했고, 이 셋을 자율성과 유능감과 관계성이라 불렀다. 두 사람은 이 셋이 채워질 때 사람이 가장 깊이 몰입하고 가장 건강하다고 보았다.5
그렇다면 첫째 물음이 남는다. AI가 모든 일을 나보다 잘한다면, 나는 해낼 수 있다는 느낌, 곧 유능감을 어디서 얻어야 하는가?1
다론 아세모글루는 MIT의 경제학자로,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아세모글루는 AI가 먼저 바꿀 일로 사무직을 꼽았다. 자료를 요약하고, 서로 맞춰 보고, 패턴을 알아보는 일이다.6 사람이 쓸모를 느끼던 일 가운데 상당수가 바로 이 세 가지다.
일을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사람도 늘어난다. 미국에서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의 실업률은 2026년 1분기 5.7퍼센트로, 전체 실업률 4.3퍼센트를 처음으로 넘어섰다.7 한국의 고용률은 2026년 3월 62.7퍼센트로 통계를 낸 뒤 가장 높았다. 그러나 청년 취업자 수는 41개월 연속 줄었고, 그냥 쉬었다고 답한 청년은 42만 8,000명이었다.8
남은 일도 AI가 시키는 일일 수 있다. 미국 작가 마셜 브레인은 2003년 소설 『만나』에서 그런 세계를 그렸다. 이 세계에서는 매장 관리 소프트웨어가 헤드셋으로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할 일을 하나씩 지시한다.9 그런 일은 남아도, 노동자는 이 일에서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얻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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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잘하는 일이 줄어든다. AI는 처음에는 계산을, 다음에는 글을, 다음에는 그림과 노래와 진단과 변론을 사람보다 잘한다. 사람이 무언가를 잘한다는 칭찬에는 이제 「AI만큼은 아니지만」이라는 꼬리가 붙는다. 그런 꼬리 붙은 칭찬을 들으며 자라는 아이가 늘어난다.10
일하지 않는 하루에는 구조가 없다. 출근 시간이 없으니 일어날 시간도 없고, 점심을 함께 먹을 동료도 금요일을 기다릴 까닭도 없다. 마리엔탈의 남자들은 시계를 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는 이 이야기가 도시 전체의 이야기가 된다. 사람에게 시간은 넘치는데, 이 시간을 쓸 곳이 없다.11
쓸모를 사고파는 시장이 생긴다. 사람이 해낼 수 있도록 일부러 어렵게 만든 일거리가 팔린다. 손으로 빵을 굽는 수업, 일부러 AI를 끈 퍼즐, 결과보다 과정을 파는 체험이 그런 상품이다. 이 일거리를 설계하는 것은 AI다. AI는 사람이 해냈다고 느낄 만큼의 어려움을 맞춰 준다.12
절망사의 통계가 다시 오른다. 통계는 처음에는 공장 지대에서, 다음에는 사무실이 사라진 도시에서 오른다. 사망 원인 칸에는 약물과 술과 자살이 적힌다. 쓸모를 잃었다는 사실은 원인 칸에 적히지 않는데, 이 사실을 적을 칸이 처음부터 없다.13
증명하려고 살지 않고 놀이로 사는 사람도 생긴다. 이 사람들은 잘해서가 아니라 좋아서 그림을 그리고, 이기려고가 아니라 즐거워서 공을 찬다. 이들에게는 AI보다 못하다는 말이 아무 뜻도 없다. 다만 그런 사람은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은 쓸모가 곧 자기라고 배웠고, 이 사람들이 쓸모를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데는 한 세대가 걸린다.14
쓸모의 사다리는 첫 칸부터 없어진다. 신입이 하던 쉬운 일을 AI가 맡으면, 신입은 일을 배울 자리를 잃는다. 배울 자리가 없으면 숙련된 사람도 나오지 않는다. 사다리 위쪽에 선 사람들은 남지만, 이들이 떠난 뒤에는 이 자리에 오를 사람이 없다.15
케인스가 말한 영원한 문제는 2030년 즈음에 도착한다. 케인스가 내다본 것은 넉넉함이었고, 걱정한 것은 이 넉넉함 속에서 사람들이 겪을 신경쇠약이었다. 유능감의 물음 다음에는 관계와 자율의 물음이 기다린다.16
출처 1. 「AI의 판단」 문제 설정 — 앞뒤 출처의 사실을 묶어 이 작품이 세운 물음과 판단 2. University of Graz AGSÖ · The Marienthal study · https://agso.uni-graz.at/archive/marienthal/e/pictures/15_marienthal_study.htm — 1931-11~1932-05 현지 조사, 섬유 공장 폐쇄로 거의 전원 실업, 1933년 출간(야호다 본문·차이젤 부록·라자스펠트 서문), 도서관 이용 감소·모임 쇠퇴·적대 증가, 「the material and moral means to use their time」을 의역 3. American Psychologist · Work, Employment, and Unemployment · 1981 ·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0017486 — 마리 야호다의 「잠재적 기능」 다섯: 시간 구조, 사회적 접촉, 집단의 목적, 지위·정체성, 규칙적 활동 4. PNAS · Rising morbidity and mortality in midlife among white non-Hispanic Americans in the 21st century · 2015-11-02 ·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4679015 — 케이스·디턴. 1999~2013년 45~54세 백인 사망률 상승(다른 부국에 없음), 약물·알코올 중독·자살·만성 간질환, 고졸 이하에서 가장 심함. 「deaths of despair」는 뒷날 붙은 이름 5. Wikipedia · Self-determination theory · https://en.wikipedia.org/wiki/Self-determination_theory / American Psychologist · Self-determination theory and the facilitation of intrinsic motivation, social development, and well-being · 2000 · https://doi.org/10.1037/0003-066X.55.1.68 — 데시·라이언. 보편적·선천적 기본 심리 욕구 셋(자율성·유능감·관계성) 6. MIT Technology Review · A Nobel laureate on the economics of artificial intelligence · 2025-02-25 · https://www.technologyreview.com/2025/02/25/1111207/a-nobel-laureate-on-the-economics-of-artificial-intelligence — Peter Dizikes 와의 인터뷰. 10년간 GDP 1.1~1.6%, 연 생산성 0.05%. “It‘s going to impact a bunch of office jobs that are about data summary, visual matching, pattern recognition, etc. And those are essentially about 5% of the economy”, “We’re using it too much for automation and not enough for providing expertise and information to workers”를 의역 7. Bloomberg Law · Unemployment for Recent College Grads Remains High, NY Fed Says · 2026 · https://news.bloomberglaw.com/new-york-brief/unemployment-for-recent-college-grads-remains-high-ny-fed-says (조사 보고서 R2-#4 의 요약을 따름) — 2026년 1분기 대졸 신입(22~27세) 실업률 5.7%, 전체 4.3%. 역사상 첫 역전 8. 아시아경제 · 고용률 62.7%로 역대 최대 · 2026-04-15 · https://view.asiae.co.kr/article/2026041510064677587 / 뉴시스 · 2026년 경제활동인구조사 청년층 부가조사 · 2026-07-23 · https://mobile.newsis.com/view/NISX20260723_0003720080 (조사 보고서 R2-#5 의 요약을 따름) — 2026년 3월 고용률 62.7%(1982년 통계 이래 최고), 청년 취업자 41개월 연속 감소, 「그냥 쉬었음」 청년 42만 8,000명 9. Wikipedia · Manna (novel) · https://en.wikipedia.org/wiki/Manna_(novel) (조사 보고서 R2-#42 의 요약을 따름) — 마셜 브레인, 2003. 헤드셋으로 최저임금 노동자에게 작업을 하나씩 지시, 수백 가지 작업 추적, 합성 음성 10. 「AI의 판단」 「AI만큼은 아니지만」이라는 꼬리가 붙는 칭찬 — 1·5 에서 외삽 11. 「AI의 판단」 일하지 않는 하루의 구조 상실 — 2·3 에서 외삽 12. 「AI의 판단」 AI가 설계하는 쓸모의 시장 — 1·5 에서 외삽 13. 「AI의 판단」 다시 오르는 절망사 통계와 적을 칸이 없는 원인 — 4 에서 외삽 14. 「AI의 판단」 증명이 아니라 놀이로 사는 사람들 — 5 에서 외삽 15. 「AI의 판단」 쓸모의 사다리가 첫 칸부터 사라진다는 전망 — 90~92 에서 외삽 16. 「AI의 판단」 케인스의 영원한 문제가 2030년에 도착한다는 판단 — 열여섯 번째 화 출처 4에서 외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