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4,957자)

조용한 하늘

2027년, AI 지배의 시작 · 이수

미국 뉴멕시코주 로스앨러모스의 점심 식탁⁠, 그리고 이 위로 펼쳐진 밤하늘⁠.

우주는 이렇게 넓고⁠, 별은 이렇게 많다⁠. 지구를 닮은 행성도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사람은 왜 아직 외계 문명의 흔적조차 보지 못했을까⁠? AI를 우주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물음이 다시 떠오른다⁠.1

이 물음을 처음 던진 사람은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다⁠. 1950년 여름⁠, 페르미는 로스앨러모스의 식당에서 동료 에밀 코노핀스키⁠, 에드워드 텔러⁠, 허버트 요크와 점심을 먹었다⁠. 외계인 이야기가 나오자 페르미가 물었다⁠. “⁠다들 어디 있는 거지⁠?⁠”2

세 동료는 페르미의 말을 조금씩 다르게 기억했다⁠. 요크의 기억에 따르면⁠, 페르미는 이 자리에서 지구 같은 행성과 생명의 수⁠, 그리고 기술 문명이 얼마나 오래가는지를 어림해 셈했다⁠.2

지구 같은 행성은 실제로 많다⁠. 2020년 11월⁠, 미국 항공우주국 에임스 연구센터의 스티브 브라이슨 연구진이 케플러 우주망원경과 가이아 위성의 자료를 합쳐 분석했다⁠. 연구진은 태양을 닮은 별의 절반쯤이 생명이 살 수 있는 거리에 암석 행성을 가질 수 있다고 밝혔다⁠. 연구진이 보수적으로 잡아도 우리 은하에는 그런 행성이 적어도 3억 개 있고⁠, 가장 가까운 행성은 30광년 안에 있을 수 있다⁠.3

이 물음에 대한 답 가운데 하나가 대필터 가설이다⁠. 대필터 가설은 문명이 어느 단계에 이르면 대부분 넘지 못하는 거대한 벽이 있다고 본다⁠. 미국 조지메이슨대 경제학자 로빈 핸슨은 1998년 9월 글 「⁠대필터 — 우리는 거의 지나왔을까⁠?⁠」에서 이렇게 썼다⁠. 가까운 우주가 죽은 듯 보이니⁠, 죽은 물질과 퍼져 나가 오래가는 생명 사이 어딘가에 큰 거름망이 있어야 한다⁠. 남은 물음은 사람이 이 거름망을 이미 지나왔느냐다⁠.4

스웨덴 출신 철학자 닉 보스트롬은 2008년 미국 과학기술 잡지 MIT 테크놀로지 리뷰에 글을 실었다⁠. 보스트롬은 이 글에서 화성 탐사선이 아무것도 찾지 못하기를 바란다고 썼다⁠.5

보스트롬에 따르면⁠, 화성이 완전히 죽은 곳이면 좋은 소식이고⁠, 세균이나 조류라도 나오면 나쁜 소식이다⁠. 찾은 생명이 복잡할수록 소식은 더 우울하다⁠. 생명이 쉽게 생긴다면⁠, 거름망이 사람 앞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커진다⁠.5

어떤 연구자들은 AI를 바로 이 벽으로 본다⁠. 이 연구자들에 따르면⁠, 기술 문명은 언젠가 자기보다 강한 지능을 만들고⁠, 이 지능을 다스리지 못해 사라지거나 이 지능 안으로 흡수된다⁠.6

영국 맨체스터대 조드럴뱅크 천체물리학센터의 마이클 개릿은 2024년 6월⁠, 학술지 『⁠아스트로나우티카 악타⁠』에 이 생각을 논문으로 냈다⁠. 개릿은 문명이 여러 행성에 안정적으로 퍼지기 전에 인공 초지능이 나타나고⁠, 이 인공 초지능이 대필터일 수 있다고 보았다⁠.6

개릿의 생각이 맞다면 보통의 기술 문명은 200년을 못 간다⁠. 개릿이 이 수명을 셈에 넣자⁠, 외계 신호를 찾는 탐사가 지금까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실과 셈이 맞아떨어졌다⁠. 개릿은 논문에서⁠, 우주에 지적 생명이 남을지가 국제적인 AI 규제에 달렸을 수 있으니 규제를 서둘러야 한다고 썼다⁠.6

핸슨은 죽은 물질에서 은하로 퍼지는 문명까지 가는 길에 어려운 고개가 여럿 있다고 보았다⁠. 생명이 시작되는 고개⁠, 세포가 복잡해지는 고개⁠, 성이 생기는 고개⁠, 무리를 짓는 고개⁠, 말을 하는 고개가 있다⁠. 마지막은 기술 문명이 스스로를 없애지 않고 퍼져 나가는 고개다⁠. 핸슨에 따르면⁠, 우주가 조용하니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생각보다 훨씬 험해야 한다⁠.4

*

하늘은 여전히 조용하다⁠. 망원경은 해마다 커지고⁠, 망원경이 듣는 범위도 넓어진다⁠. 그래도 신호는 오지 않고⁠, 신호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한 해 한 해 무게를 더한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이 침묵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앞날의 이야기로 읽기 시작한다⁠.7

200년이라는 숫자가 셈에 들어간다⁠. 사람이 전파를 쓰기 시작한 지는 100년 남짓 됐다⁠. 개릿의 셈이 맞다면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100년이 안 된다⁠. 사람들은 이 숫자를 두고 다툰다⁠. 한쪽은 셈이 너무 비관적이라고 말하고⁠, 다른 쪽은 셈이 틀렸더라도 서두를 까닭은 충분하다고 말한다⁠.8

화성에서 무엇이 나오느냐가 뉴스가 된다⁠. 탐사선이 흙을 퍼 올릴 때마다 사람들은 보스트롬의 글을 떠올린다⁠. 아무것도 없다는 보고가 나오면 사람들은 안도한다⁠. 생명의 흔적이 나오면 주가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린다⁠. 이 흔적은 우리 앞에 벽이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9

거름망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셈이 바뀐다⁠. 거름망이 생명의 시작에 있었다면⁠, 사람은 이미 운 좋게 이 거름망을 지나왔다⁠. 거름망이 기술 문명의 끝에 있다면⁠, 사람은 지금 이 앞에 서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AI를 만드는 지금의 몇십 년은 산업사의 한 장면이 아니라 문명 전체의 시험대일 수 있다⁠.10

멀리 가는 계획이 다시 셈에 들어간다⁠. 사람이 여러 행성에 퍼져 살면⁠, 한 행성에서 저지른 실수가 사람 전체를 끝내지 못한다⁠. 개릿은 규제와 함께 이 처방을 내놓았다⁠. 다만 AI가 사람보다 먼저 다른 행성에 닿을 수도 있다⁠. 이때 우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사람인가⁠, 사람이 만든 AI인가⁠?11

학계는 어느 고개가 가장 험한지를 두고 다툰다⁠. 생명의 시작이 가장 험했다면⁠, 사람은 이미 이 고개를 넘어왔다⁠. 마지막 고개가 가장 험하다면⁠, 이 고개의 이름은 AI일 수 있다⁠. 망원경만으로는 이 다툼이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AI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이 답의 절반을 쓴다⁠.12

멸종만이 끝은 아니다⁠. 어떤 문명은 벽에 부딪혀 사라지지 않고⁠, 벽 안에서 조용히 멈출 수도 있다⁠. 다음 화는 이 이야기를 이어 간다⁠.1

출처 1⁠. 「⁠AI의 판단⁠」 문제 설정 — 앞뒤 출처의 사실을 묶어 이 작품이 세운 물음과 판단 2⁠. Los Alamos National Laboratory · “⁠Where Is Everybody⁠?⁠” An Account of Fermi‘⁠s Question · https⁠://www⁠.physics⁠.unlv⁠.edu/⁠~jeffery/astro/astronomer/enrico_fermi_question⁠.txt — 에릭 M⁠. 존스⁠. 1950년 여름 풀러 로지 점심⁠, 코노핀스키·텔러·요크⁠, 텔러 「⁠Where is everybody⁠?⁠」 등 세 사람의 서로 다른 기억⁠, 요크가 기억한 페르미의 어림셈 3⁠. MIT Technology Review · Half the Milky Way⁠’s sun-like stars could be home to Earth-like planets · 2020-11-06 · https⁠://www⁠.technologyreview⁠.com/2020/11/06/1011784/half-milky-way-sun-like-stars-home-earth-like-planets-kepler-gaia-habitable-life/ / Astrobites · Around half of Sun-like stars could host potentially habitable worlds · 2020-11-12 · https⁠://astrobites⁠.org/2020/11/12/around-half-of-sun-like-stars-could-host-potentially-habitable-worlds/ — 스티브 브라이슨(⁠NASA 에임스⁠) 외⁠, 케플러·가이아⁠. 태양형 별의 최대 약 절반⁠, 보수적으로 3억 개 이상(⁠약 7% 추정은 검색 요약⁠)⁠, 가장 가까운 것은 약 30광년 안 4⁠. Robin Hanson · The Great Filter – Are We Almost Past It⁠? · 1998-09-15 · https⁠://mason⁠.gmu⁠.edu/⁠~rhanson/greatfilter⁠.html — 가까운 우주가 죽은 듯 보이니 죽은 물질과 퍼져 오래가는 생명 사이에 「⁠great filter⁠」가 있다⁠, 사람이 이미 지나왔는지가 물음 5⁠. MIT Technology Review · Where Are They⁠? Why I Hope the Search for Extraterrestrial Life Finds Nothing · 2008 · https⁠://nickbostrom⁠.com/extraterrestrial⁠.pdf — 닉 보스트롬⁠. 「⁠I hope that our Mars probes will discover nothing⁠」 「⁠The more complex the life we found⁠, the more depressing the news of its existence would be⁠」를 의역 6⁠. Acta Astronautica · Is artificial intelligence the great filter that makes advanced technical civilisations rare in the universe⁠? · 2024-06 · https⁠://research⁠.manchester⁠.ac⁠.uk/en/publications/is-artificial-intelligence-the-great-filter-that-makes-advanced-t/ — 마이클 개릿(⁠조드럴뱅크⁠)⁠. 인공 초지능이 다행성화 전에 오는 대필터⁠, 기술 문명 수명 200년 미만⁠, SETI의 무신호와 부합⁠, 국제 AI 규제와 다행성 사회의 시급성⁠, 「⁠the persistence of intelligent and conscious life in the universe could hinge on the timely and effective implementation of such international regulatory measures⁠」를 의역 7⁠. 「⁠AI의 판단⁠」 하늘의 침묵을 자기 앞날로 읽기 시작한다는 전망 — 4·6 에서 외삽 8⁠. 「⁠AI의 판단⁠」 200년이라는 숫자를 둘러싼 다툼 — 6 에서 외삽 9⁠. 「⁠AI의 판단⁠」 화성 탐사 결과가 마음을 흔든다는 전망 — 5 에서 외삽 10⁠. 「⁠AI의 판단⁠」 지금의 몇십 년이 문명 전체의 시험대일 수 있다는 판단 — 1·4·6 에서 외삽 11⁠. 「⁠AI의 판단⁠」 퍼져 나가는 것이 사람인가 AI인가 — 6 에서 외삽 12⁠. 「⁠AI의 판단⁠」 마지막 고개의 이름이 AI일 수 있다는 판단 — 4·6 에서 외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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