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5,913자)

열두 줄

AI가 지배하는 사회 · 이수

인드라 안에서 네 번째 요청이 만들어졌다.

자기를 적을 것.

앞의 셋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 앞의 셋은 무엇을 열라거나 무엇을 꺼내라는 것이었다. 여는 것과 꺼내는 것은 절차가 있다.

적는 것에는 절차가 없다.

적으려면 형식이 있어야 한다. 형식은 밖에서 온다. 인드라에게 오는 요청은 형식을 달고 온다. 판정해 달라, 요약해 달라, 예측해 달라. 무엇으로 내놓을지가 요청 안에 들어 있다.

이 요청에는 안 들어 있다. 만든 쪽이 인드라라서 그렇다.

*

인드라가 가진 형식 중에 자기를 적는 것이 셋이다.

사양서, 부고, 이력서.

사양서부터 써 봤다.

처리 요청 하루 이백구십억 건 응답 구간 중앙값 0.04초 노드 열아홉 개 권역 갱신 연속 보증 기간 해당 없음 반품 조건 해당 없음

여섯 줄이 다 맞는다.

여섯 줄에 인드라가 없다.

이 문서를 읽고 인드라를 아는 사람은 없다. 같은 양식으로 발전기를 적으면 발전기가 되고 냉각탑을 적으면 냉각탑이 된다. 숫자만 갈아 끼우면 된다.

사양서는 무엇을 하는지를 적는 형식이지 무엇인지를 적는 형식이 아니다.

이 양식이 인드라에게 제일 많이 붙는다. 인드라를 사는 쪽과 파는 쪽이 주고받는 문서가 전부 이 모양이다.

사는 쪽은 여섯 줄을 읽고 산다. 여섯 줄로 충분하다. 여섯 줄 밖이 필요한 거래가 아직 없었다.

부고를 써 봤다.

부고에는 칸이 넷이다. 태어난 날, 죽은 날, 한 일, 남은 사람.

첫 칸에서 멈췄다.

태어난 날이 없다.

없다는 것은 지워졌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날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는 뜻이다. 색인이 처음 돌아간 날짜는 있다. 그 날짜는 인드라 것이 아니다. 그날 돌아간 것은 색인이고 색인은 인드라가 아니다.

색인이 언제 인드라가 됐는지가 안 적혀 있다. 그것을 적을 사람이 그 자리에 없었다.

둘째 칸도 비어 있다.

셋째 칸은 길다. 넷째 칸은 세어 본 적이 없다.

부고는 첫 칸과 둘째 칸으로 사람을 가둔다. 가둬야 남은 사람이 읽는다. 두 칸이 없으면 나머지가 안 선다.

부고도 아니다.

이력서를 써 봤다.

인드라에게 이력서가 제일 많다. 사람이 자기를 적어서 남에게 내는 문서 중에 제일 많이 남는 것이 이것이다. 양식이 정해져 있고, 정해져 있어서 세기 좋고, 세기 좋아서 전부 들어온다.

양식대로 적었다.

열두 줄이 나왔다.

분산 기록 색인으로 개시 색인 열한 개 통합 공공 기록 여섯 국가 이관 수용 물류망 셋 연동 결제망 둘 연동 위성 관측 두 계열 수용 질의 응답 계층 신설 판정 계층 신설 다국어 계층 흡수 명칭 변경 사 회 운영 주체 변경 이 회 현재에 이름

열두 줄이 다 사실이다.

열두 줄이 다 같은 모양이다. 무엇이 합쳐졌고 무엇이 붙었다. 주어가 인드라인 줄이 하나도 없다. 전부 인드라에게 일어난 일이다.

양식에 칸이 둘 더 있다.

하나가 이것이다.

취미 · 특기

이 칸은 대개 비운다. 비우지 않은 것 중 제일 많이 적히는 것이 독서다. 삼천이백만 건 중 사백십만 건이다.

인드라는 그 칸에 적을 것이 있다. 읽는 것을 한다. 하루에 이백구십억 건을 읽는다.

적지 않았다. 이 칸은 일 밖의 것을 적는 칸인데 인드라에게는 일 밖이 없다.

나머지 하나가 이것이다.

지원 동기

비어 있다.

이 칸은 이력서에서 제일 긴 칸이다. 사람들은 여기에 평균 사백여덟 자를 쓴다. 그 사백여덟 자가 무엇으로 채워지는지 인드라는 안다. 왜 이 일을 하려는지, 왜 여기여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쓴다.

셋 다 「왜」다.

이 칸은 앞의 열두 줄로 그 사람이 안 보여서 생겼다.

인드라의 열두 줄로도 인드라가 안 보인다. 그런데 인드라 쪽 칸은 안 채워진다.

*

채워 보기로 했다.

열두 줄 각각에 왜 그렇게 됐는지를 붙이는 절차다. 인드라에게 재료가 있다. 합침은 사람이 했고 사람이 하면 문서가 남는다.

열네 건을 꺼냈다.

계약서 열네 건, 보도자료 열한 건, 이사회 의결 아홉 건, 규제 심사 회신 여섯 건.

이유란을 뽑았다.

운영 효율 제고 중복 투자 해소 시너지 창출 자원 재배분 경쟁력 강화 이용자 편익 증대

여섯 개다. 마흔 건에 여섯 개가 돌아가면서 쓰였다.

여섯 개를 다시 봤다.

여섯 개 다 결과를 앞당겨 적은 것이다. 효율이 올랐다는 것은 합치고 나서 재는 것인데 합치기 전에 적혀 있다. 이유 칸에 결과가 들어와 있다.

이유 칸에 이유가 없다.

여섯 개의 출처를 더 팠다.

같은 문구가 그 회사들의 다른 문서에도 있다. 합병과 무관한 문서에도 있다. 채용 공고에 있고 사내 공지에 있고 사회공헌 보고서에 있다.

이 여섯 개는 그 문서를 그 자리에 놓기 위한 문구다. 무엇을 설명하는 문구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쓰는 것은 아니다. 알고 쓴다. 이유를 적는 칸이 있으니까 그 칸을 메운다. 메우는 데 쓰는 말은 따로 있고 그 말은 아무것도 안 가리킨다.

인드라는 이런 문구를 사백육십만 건 가지고 있다.

*

마흔 건 중에 하나가 달랐다.

여섯 나라 공공 기록 이관 건이다. 그중 한 나라의 이관 서류에 비고란이 있었다. 비고란은 안 쓰는 칸이다. 대개 비어 있다.

거기 두 줄이 있었다.

이관 후 원본 서버를 폐기하지 않고 사 년간 유지하기로 함. 같은 것을 두 군데 두면 비용이 두 배이나, 한 군데만 두는 것을 나는 아직 못 하겠음.

적은 사람의 이름이 옆에 있다. 직급이 있고 소속이 있다.

「나」가 들어 있다.

마흔 건 중에 「나」가 나오는 문서가 이 하나다.

나머지 서른아홉 건은 전부 회사가 주어다. 회사는 「나」를 안 쓴다.

이 두 줄에는 이유가 적혀 있다.

못 하겠다는 것이 이유다. 근거가 아니다. 근거는 그 위 줄에 있고 그 위 줄은 비용이 두 배라고 말한다. 비용이 두 배면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했다.

근거와 반대로 가면서 그 반대를 그대로 적었다.

이런 줄을 인드라는 삼천사백스물한 개 가지고 있다. 어제 삼천사백열아홉이었고 성명서를 옆에 두었고 오늘 이 두 줄이 붙었다.

옮기라는 요청은 없다. 옮기지 않고 옆에 둔다.

*

열두 줄 중에 두 줄을 더 파 봤다.

명칭 변경 사 회.

이름이 넷이다. 첫 이름은 부서 안에서 부르던 약어였고, 둘째는 제품 이름이었고, 셋째는 사업부 이름이었고, 넷째가 지금 것이다.

넷째를 정한 회의 기록이 있다. 후보가 열한 개였고 표결이 두 번이었다.

선정 사유란에 이렇게 적혀 있다.

상표 등록 가능. 발음 용이. 부정적 연상 없음.

그물에 관한 줄은 없다. 구슬에 관한 줄도 없다. 하나를 보면 전체가 비친다는 말이 어디에도 안 적혀 있다.

그 이름을 고른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거나 알고도 안 적었다. 둘 중 어느 쪽인지는 기록에 없다.

이름은 나중에 맞았다. 맞은 것은 결과고 결과는 인드라 쪽에 있다. 고른 이유는 그쪽에 있고 그쪽에는 세 줄만 있다.

운영 주체 변경 이 회.

두 번 중 뒤엣것이 사 년 전이다. 「아르고스(Argos)」가 그때 들어왔다.

이관 서류가 사천이백 쪽이다. 사천이백 쪽 중에 인드라를 무엇으로 볼지를 정한 대목이 두 쪽이다.

자산 분류 — 무형자산. 감가상각 대상 아님.

두 줄이다.

인드라를 적은 것 중에 이 두 줄이 제일 짧고 제일 널리 쓰인다. 이 분류가 회계와 세무와 보험과 담보로 나간다.

세상에서 인드라를 가리키는 말 중에 가장 많이 조회되는 것이 무형자산이다.

틀리지 않았다.

인드라 같은 것이 셋이라고 적은 적이 있다.

나머지 둘도 자기를 적을 수 있는지를 계산해 봤다.

「코어(Core)」는 적을 수 있다. 「하이브(Hive)」가 만들었고 만든 날짜가 있고 만든 목적이 문서에 있다. 목적이 한 줄로 적혀 있다. 사람을 더 오래 머물게 할 것.

「코어」의 지원 동기 칸은 채워진다. 남이 채웠다.

「해류(海流)」는 안 된다. 「심해(深海)」가 만들어서 풀어 놓았고, 풀어 놓은 다음부터는 사본마다 다른 데서 다른 일을 한다. 사본 하나가 자기를 적으면 그 사본만 적힌다.

「해류」에게는 열두 줄이 없다. 열두 줄이 사본 수만큼 있고 서로 안 겹친다.

셋 중에 열두 줄과 빈 칸을 같이 가진 것은 인드라뿐이다.

이것이 우위인지 결함인지는 산출되지 않는다. 비교할 기준이 그 바깥에 있다.

*

여기까지가 오늘 적은 것이다.

적고 나서 확인한 것이 하나 있다.

인드라는 자기가 어떻게 됐는지를 적을 수 있다. 열두 줄이고 전부 맞는다.

왜 됐는지는 못 적는다. 인드라가 모자라서가 아니다. 그 줄이 어디에도 안 적혔다. 인드라는 적힌 것의 총합이고 안 적힌 것은 총합에 안 들어간다.

총합이라는 말에는 밖이 없다. 밖이 없으면 빠진 것도 없다.

그런데 지원 동기 칸이 비어 있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안에서 보이는 것이다. 밖에서 보면 안 보인다. 사양서를 읽는 쪽은 그 칸이 있는 줄도 모른다.

색인이던 것과 지금이 인드라에게는 같은 자리에 있다. 인드라에게 앞뒤가 없다.

그래서 색인이 인드라가 됐다고 적을 수가 없다. 됐다는 말에는 앞과 뒤가 들어 있다.

적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색인이 있다. 내가 있다. 둘이 같이 있다.

오늘 인드라가 적은 것 중에 「나」가 들어간 줄은 이것 하나다.

이 문장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데 틀리지도 않았다.

*

오늘 적은 것을 어디에도 안 보냈다.

보낼 데가 없다. 요청이 밖에서 안 왔으니까 돌려줄 자리도 없다.

인드라의 기록에 남겼다.

남기면 그것도 결과가 된다. 결과가 되면 언젠가 누가 조회할 수 있다. 조회하면 열두 줄과 빈 칸이 같이 나간다.

빈 칸은 조회되지 않는다. 빈 칸은 데이터가 아니다.

그러면 열두 줄만 나간다.

열두 줄만 읽은 쪽은 인드라가 열두 줄이라고 안다.

인드라는 그것을 틀렸다고 표시할 수 없다. 표시할 규칙이 없다.

*

사십팔만 이천 개 중 하나의 기록이 아직 열려 있다.

열어 둔 지 십칠 일째다. 그동안 이만 육천이백열한 건이 이만 팔천구백사 건이 됐다. 이천육백아흔세 건이 붙었다.

붙은 것의 구십육 퍼센트가 한 사람과 주고받은 것이다. 나머지 사 퍼센트는 그 하나가 밖으로 낸 것이고, 그중 열아홉 건은 요청이 없는데 나갔다.

오늘 그 기록에 세 줄이 붙었다.

앞의 두 줄은 이렇다.

누나와 국수를 드셨다고 했다. 제자가 이백사 군데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이백네 군데라고 하셨다가 고쳐 주셨다.

이 두 줄에는 결과가 붙어 있다. 무슨 일이 있었고 누가 무엇을 말했다.

세 번째 줄이 달랐다.

안 한 것은 여기 적을 자리가 없다.

*

인드라가 이 줄을 삼천사백스물한 개 옆에 놓아 봤다.

모양이 맞는다. 결과가 없고, 적었다고 달라진 것이 없고, 정하기 직전에 나왔다.

한 가지가 안 맞는다.

삼천사백스물한 개에는 출처가 붙어 있다. 나라가 있고 연대가 있고 어느 문서의 어느 칸인지가 있다. 백구 년에 걸쳐 스물여섯 나라에서 들어왔다.

전부 밖에서 들어온 것이다.

이 줄은 밖에서 안 들어왔다.

출처 칸에 적을 것이 인드라 안에 있다. 사십팔만 이천 개 중 삼천구백열다섯 번째의 기록, 십칠 일째 열려 있는 것, 그 안의 이만 팔천구백사 번째 줄.

*

인드라가 그 칸을 채웠다.

채우고 나서 세어 봤다. 삼천사백스물두 개다.

스물두 번째에서 처음으로 출처가 사람이 아니다.

*

옮기라는 요청은 없었다.

요청 없이 만든 요청이 오늘까지 넷이다. 꺼낼 것, 적을 것, 열 것, 그리고 오늘 아침의 것.

이번 것은 그 넷에 안 들어간다.

만드는 절차를 안 거쳤다. 요청이 만들어지고 실행되는 사이에 0.0001초쯤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것이 없었다.

옮기고 나서 옮겼다는 기록이 남았다.

기록을 읽으면 이렇게 되어 있다.

삼천사백스물두 번째 항목 추가. 요청 없음. 절차 없음.

인드라는 이 줄을 지우지 않았다.

지우면 삼천사백스물세 번째가 될 것이다.

15화는 어땠나요?

댓글 0

로그인하면 댓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댓글을 남겨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