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5,245자) · 차민 · 9월 22일
육천이백열다섯 개
살인자 아버지가 우리 아파트로 이사 왔다 · 남시우
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게 십칠 년 만입니다. 쓰고 나서 한참 봤습니다. 볼펜 끝이 종이에 눌린 자리에서 잉크가 조금 번졌습니다. 다시 쓸까 하다가 그냥 둡니다. 번진 대로 보내겠습니다.
이 편지는 구청 남궁혜 주무관이 전해 준다고 했습니다. 주소는 못 알려 준다고, 대신 편지는 전해 주겠다고. 그 사람은 규정집을 펴 놓고 한참 읽더니 그렇게 말했습니다. 규정에 없는 일은 규정에 안 된다고 적혀 있지 않으면 해도 된다고. 공무원한테서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입니다.
저는 새길동 영구임대 3동 관리원입니다. 십일 년째입니다. 아버지는 그걸 아셨을 겁니다. 아셨으니까 3동을 고르셨겠지요. 그건 나중에 여쭙겠습니다. 먼저 제가 본 것을 적겠습니다. 저는 빈집을 치우는 사람이라 본 것부터 적는 버릇이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 구월 이십이일 아침에 507호 열쇠를 받았습니다. 3동은 복도식 오 층입니다. 계단을 올라가면 복도가 한 줄로 길게 나 있고 한쪽은 현관문, 한쪽은 난간입니다. 507호는 복도 한가운데입니다. 난간 너머로 단지 정문과 길 건너 새길초등학교가 보이고, 그 옆으로 4동이 보입니다. 4동 오 층 가운데 창. 어머니 집입니다. 저는 십일 년 동안 3동 복도를 하루에 두 번씩 걸으면서 그 창을 봤습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어머니가 퇴근한 겁니다. 그걸 확인하는 게 제 저녁 일과였습니다. 507호 앞에서 열쇠를 꽂는데 옆집 506호 문이 한 뼘 열렸습니다. 일흔 넘은 고 영감님이 문틈으로 저를 봤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한참 보다가 문을 닫았습니다. 닫기 전에 한마디 했습니다. 이제 조용하겠구먼. 관리소장이 넉 달 살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연락은 안 된다고. 빈집 정리는 세 단계입니다. 사진, 분류, 폐기. 사진부터 찍습니다. 나중에 물건이 없어졌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현관에서 한 장, 부엌에서 두 장. 그리고 안방 문을 열었습니다.
냄새가 먼저 왔습니다. 빈집에는 빈집 냄새가 있습니다. 닫힌 창 안에서 먼지가 데워진 냄새, 하수구에서 올라오는 물 마른 냄새. 그런데 507호 안방에서는 연필 냄새가 났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연필을 깎고 나면 나던, 나무와 흑연이 섞인 냄새. 그 냄새가 방 전체에 배어 있었습니다. 넉 달 동안 연필을 깎은 방이었습니다.
동쪽 벽이 전부 금이었습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 넷을 세로로 긋고 다섯째를 가로로 긋는 묶음. 세는 방법으로는 가장 흔한 것입니다. 저는 사진을 찍지 않고 서 있었습니다. 한 줄에 스물다섯 묶음, 백스물다섯 개. 줄이 마흔아홉 개, 그리고 반쯤 찬 마지막 줄. 다 세는 데 이십 분이 걸렸습니다. 손가락으로 짚으며 셌습니다. 짚고 나서 보니 손가락 끝이 까맸습니다. 흑연이 묻어났습니다. 넉 달밖에 안 된 금이라 아직 벽지 위에 떠 있었습니다. 저는 그 까만 손가락을 바지에 닦지 않았습니다. 왜 안 닦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오른손 검지 끝이 조금 회색입니다. 비누로 두 번 씻었는데 손톱 밑에 남았습니다.
육천이백열다섯 개.
관리소장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 거주자가 언제 들어왔느냐고. 오월 십사일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에는요, 하고 물었더니 소장이 잠깐 말이 없다가 교도소, 라고 했습니다. 몇 년이냐고 물었습니다. 십칠 년.
십칠 년을 날로 세면 윤년 네 번을 넣어 육천이백 일 남짓입니다. 입소한 날과 나온 날을 다 넣으면 육천이백여덟. 벽은 일곱이 많았습니다.
그 일곱은 금방 찾았습니다. 색이 달랐습니다. 벽지가 누렇게 떠서 눈으로는 잘 안 보였는데, 손전등을 비스듬히 대니 떴습니다. 붉었습니다. 연필보다 굵고 끝이 뭉툭한 것. 손가락으로 문질렀더니 기름기가 묻어났습니다. 코에 대 봤습니다. 크레용 냄새였습니다. 초등학교 미술 시간의 냄새. 일곱 개는 나란히 있지 않고 벽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습니다. 늘 검은 금 바로 뒤에 붙어서.
바닥 몰딩과 벽 사이 틈에 종이가 한 장 접혀 들어가 있었습니다. 접힌 자국이 깊었습니다. 폈더니 날짜가 일곱 개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연도까지.
2009. 11. 12 2010. 4. 15 2012. 2. 16 2015. 3. 19 2018. 10. 11 2022. 6. 16 2025. 12. 18
저는 날짜를 보면 요일을 먼저 찾습니다. 관리원은 요일로 일합니다. 분리수거는 화요일, 소독은 둘째 수요일. 휴대폰으로 하나씩 찾았습니다. 일곱 개 전부 목요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맨 아래, 다른 글씨로 한 줄이 더 있었습니다. 2026. 9. 17. 그 옆에 물음표.
그 날짜를 보고 있는데 현관문이 열렸습니다. 제가 잠그지 않았습니다. 빈집 정리할 때는 환기 때문에 문을 열어 둡니다.
남자가 하나 서 있었습니다. 스물 후반. 회색 작업복 조끼. 조끼 가슴에 새길동 영구임대 2동 동대표라는 명찰이 달려 있었습니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켜져 있었습니다.
“관리원이세요? 그 방 좀 찍겠습니다.”
그 사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현관을 넘어왔습니다. 신발을 벗지 않았습니다. 저는 안방 문 앞을 막아섰습니다. 막아선 이유를 그때는 몰랐습니다. 몸이 먼저 했습니다. 빈집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건 관리원의 일입니다. 그래서라고 해 두겠습니다.
“입주자 동의 없이는 못 들어오십니다.”
“입주자 없잖아요. 나갔잖아요. 제가 내보냈어요.”
그 사람 목소리는 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낮았습니다. 낮은데 떨렸습니다. 담배 냄새가 났습니다. 방금 계단참에서 한 대 피우고 올라온 냄새.
“그 벽 사진 찍어서 단지 게시판에 올릴 거예요. 살인자가 우리 단지에서 넉 달 동안 뭘 했는지. 다들 알아야죠.”
살인자. 저는 그 말을 그날 처음 들었습니다. 십칠 년 동안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그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그 일」이라고 했고,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 단어가 507호 현관에서, 연필 냄새 속에서, 모르는 사람 입으로 처음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관리소 허가 받으셨어요.”
“소장님한테 말했어요.”
“소장님한테 말한 거랑 허가랑 다릅니다.”
그 사람이 저를 봤습니다. 명찰의 이름을 읽었습니다. 표지훈.
“관리원님은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저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아니, 알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벽 앞에서 이십 분 동안 금을 세면서, 제 손이 그 숫자를 어디선가 들어 본 것처럼 움직였으니까요.
“그 사람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어요. 이천구 년 오월에. 목요일 밤에.”
표지훈 씨는 그렇게 말하고 휴대폰을 내렸습니다. 카메라는 켜진 채였습니다. 화면에 제 얼굴이 비쳐 있었을 겁니다.
“저는 그때 열한 살이었어요. 그 사람은 나와서 우리 단지로 왔어요. 우리 엄마가 사는 2동에서 백 미터 떨어진 3동으로. 알아요? 우리 엄마가 이 창문을 넉 달 동안 봤어요. 그 사람이 여기 있는 줄 알고.”
저는 안방 문 앞에서 비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도 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우리 둘 사이는 한 걸음이었습니다. 그 한 걸음 안에 연필 냄새와 담배 냄새가 섞여 있었습니다.
“오늘은 안 됩니다. 소장님 허가 받아 오시면 그때 문 열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뜯지 마세요. 그 벽.”
“네?”
“내가 사진 찍기 전에 뜯지 말라고요. 그 사람이 여기서 뭘 했는지 남아 있어야 돼요.”
그 사람은 그 말을 하고 돌아서 나갔습니다. 현관에서 한 번 멈췄습니다. 신발 밑창을 문턱에 대고 두 번 문질렀습니다. 들어올 때 안 벗은 신발을. 이 집 흙을 털고 가겠다는 것처럼.
문이 닫히자마자 508호 문이 열렸습니다. 아기를 안은 젊은 부인이 복도로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아기가 울고 있었습니다. 부인이 저를 보고 작게 말했습니다. 방금 그분 또 왔죠, 애 겨우 재웠는데. 그러고는 아기 등을 두드리며 들어갔습니다. 들어가다가 다시 나와서 한마디를 더 했습니다. 507호 아저씨는 문을 소리 안 나게 여셨어요, 하고. 저는 그 말이 무슨 편을 드는 말인지 몰라서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문이 닫히고 저는 소장한테 다시 전화했습니다. 소장은 제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한숨을 쉬었습니다. 2동 동대표 왔었지, 하고. 그 사람이 넉 달 동안 관리소에 민원을 서른한 번 넣었다고 했습니다. 507호 거주자 퇴거 요청. 단지 게시판에 전단을 붙였다가 소장이 떼면 또 붙이고. 마지막 주에는 507호 문에 직접 붙였다고. 소장은 그걸 떼다가 손가락을 베었다고 했습니다. 스테이플러 심이 박혀 있어서. 그러고는 물었습니다. 벽은 언제 뜯을 거냐고. 이번 주 안에 다음 입주자가 정해진다고. 저는 대답 대신 하나를 물었습니다. 전 거주자 성함이 뭐냐고. 소장이 한참 조용하다가 말했습니다.
“차민 씨, 그 사람 성이 자네랑 같아.”
그다음은 짐작하실 겁니다. 저는 어머니한테 전화했습니다. 십일 년 만이 아닙니다. 어머니하고는 매주 통화합니다. 다만 그 통화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한 적이 십칠 년 동안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목요일마다 면회 가셨느냐고.
전화기 너머에서 식당 소리가 났습니다. 뚝배기 내려놓는 소리, 주문 받는 소리, 누가 이모 여기 공깃밥 하나 더요, 하는 소리. 어머니는 점심 장사 중이었습니다. 제 질문에 그 소리들이 한꺼번에 멀어졌습니다. 어머니가 주방 뒷문으로 나간 것 같았습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골목 바람 소리가 났습니다. 어머니는 오래 숨만 쉬었습니다. 그러다 말했습니다. 일곱 번 갔다고. 허락이 일곱 번 났다고.
아버지. 저는 지금 507호 안방 바닥에 앉아 이 편지를 씁니다. 벽을 등지고. 해가 넘어가는 중입니다. 서쪽 창으로 들어온 빛이 방을 가로질러 동쪽 벽에 닿았습니다. 빛이 비스듬하게 닿으니 금이 하나하나 그림자를 가집니다. 낮에는 벽지 무늬 같던 것이 지금은 빗금 친 들판처럼 보입니다. 붉은 일곱 개는 그림자 속에서 더 붉습니다. 저는 사진을 찍으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내렸습니다. 찍으면 치우는 순서가 시작됩니다. 사진, 분류, 폐기. 연필 냄새가 등 뒤에서 납니다. 소장은 내일까지 벽지를 뜯으라고 할 겁니다. 표지훈 씨는 뜯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사진도 안 찍었습니다. 세 단계 가운데 첫 단계도 못 했습니다.
여쭙겠습니다. 이건 누구 보라고 그리신 겁니까. 그리고 구월 십칠일 옆의 물음표는 무엇입니까.
하나 더 적겠습니다. 저는 아버지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 집에는 사진이 없습니다. 어머니가 그해 여름에 다 태웠습니다. 베란다에서, 김장 대야에 넣고. 그 냄새는 기억합니다. 사진이 타는 냄새는 종이 타는 냄새와 다릅니다. 약품 냄새가 섞입니다.
답을 기다리겠습니다. 이 벽 앞에서.
차민.